1.
일반인들의 상식과 달리 신약성서는 한 권의 책이 아니다. 대략 49년부터 130년 사이에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일종의 '수집물(collection)'이라 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문의 내용과 길이가 상이한 수천 개의 사본들만이 존재한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신약성서 사본은 영국 맨체스터의 존 라일란즈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요한복음> 18장 31절부터 33절이 적혀있는 작은 파피루스 사본이다. 신약성서 전문이 담겨있는 가장 오래된 사본은 19세기 독일 학자 티셴도르프가 시나이 산의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발견한 시나이 사본이다. 이것은 4세기 것으로 추정되며 헬라(그리스)어 대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한글 신약성서는, 이렇듯 무수한 이종(異種) 신약 사본 연구를 통해 20세기에 형성된 헬라어 신약성서에 토대를 둔 번역본이다. 따라서 한글판 신약성서 자체를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변하는 것은 신약성서의 형성과 그 사본의 역사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온 맹신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2.
원래 복음서에는 지금과 같은 명칭이 붙어 있지 않았다. 2세기에 사도 계열의 문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마가복음, 마태복음과 같은 명칭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의 직계 사도들은 갈릴리 출신의 촌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헬라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복음서는 예수의 직계 제자그룹에 의해 쓰였다기보다 예수에 관한 구전 전승을 보전하고 있던 3세대 기독교인들에 의해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이 누구인지는 미상)
처음에는 예수이야기가 문서로 기록되어 유통되디 않았다. 예수 사후 그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 최근에 학자들은 복음서에 남아 있는 구전성의 자취를 분석하여, 복음서가 수십 년에 걸쳐 유통되던 구전문학의 산물임을 밝혀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독일 학자들은, 예수의 어록만을 수집한 Q문서(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Quelle의 첫글자)가 복음서 기록 이전에 존재했을 거라는 가설을 발표했다.
3.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예수에 관한 최초의 복음서로 보고 있다. 마가는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예수에 관한 다양한 구전을 기초로, 예수이야기에 일정한 연대기와 서사적 구조를 덧붙여 복음서라는 문서 형태로 남긴다. <마가복음>의 기록 연대는 70년경으로, 유대가 로마와 독립전쟁을 벌이던 시기나 그 직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마태나 누가는 <마가복음>과 예수의 어록 자료집인 Q문서를 토대로 자신들이 수집한 예수이야기를 창의적으로 결합해 복음서를 만들었다
. 학자들은 마가와 마태, 누가의 복음이 서로 긴밀한 문학적 연관성과 유사성이 있다는 점에서, 이들 복음서를 공관(共觀)복음서라고 부른다.
4.
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예수에 관한 객관적인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삶과 독특한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의 삶 특히 그의 수난과 부활이 지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 천착했다. 가령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자신의 저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31절)
이처럼 복음서의 저작 동기는 예수에 관한 객관적 역사 보도가 아닌 신앙을 전파하고 변증하는 데 있었다.
5.
신약성서를 읽다 보면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을 목격하게 된다. 복음서는 예수의 기적과 부활 이야기를 들려준다.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은 이러한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을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배치되는 고대 유대인들의 신화로 치부해 버렸다. 따라서 이 시기에 쓰인 수많은 예수전들은 그의 기적과 부활이야기를 삭제해 버리고, 인간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만 부각시켰다.
2000년 전 예수가 살았던 시대는 고대 유대 사회였다. 신약의 저자들은 세상을 이성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와 우주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언어와 도구들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현대인처럼 인간의 삶 속에서 봉착하게 마련인 고난과 공포, 죽음과 영원에 대한 의미있는 질문들을 지니고 있었다. 신약의 저자들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을 가지고 자신들의 삶과 세계 그리고 우주에 대해 설명했다.
6.
사실 신약성서라는 문서 자체를 놓고 보다면, 바울이 예수보다 더 비중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어떠한 저작도 후대에 남기지 않았고, 그의 운동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한정된 유대교 갱신 운동이 일환이었다. 이에 비해 사도 바울의 저자들은 신약성서의 중추를 구성한다.
바울에 이르러 비로소 예수운동은 헬라 세계의 청중들과 대화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를 얻게 된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지니는 세계사적 의미를 유려한 수사학적 틀 속에서 이론화하였다.
7.
기독교를 유대교와는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임에도 역사적 바울에 대한 평가는크게 엇갈린다. 아마 서구 지성사를 통해 바울만큼 극단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세계화한 교회의 건설자요, 신약 문서에서 가장 많은 저서남긴 우대한 저술가이자 신학자로 호평되는 한편, 단순 명쾌한 예수의 가르침을 비의적(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으로 왜곡시킨 음험한 사상가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시대에 따라 바울에 관한 서구지식인들의 입장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8.
바울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소외받던 자들과 함께 율고 웃었던 '인간 예수'보다 만인의 죄를 씻어 준 '신적인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에 더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바울 신학은 '역사적 예수'보다는 '신앙의 그리스도'에 기초해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보다 '하나님의 의'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 독일의 신학자들은 예수와 바울 사이의 불연속성에 주목해 왔다. 튜빙겐의 신학자 바우르는 바울의 메시지가 지니는 헬라적 경과 보편적 성향에 주목하여, 팔레스타인의 특수성 내포하는 역사적 예수의 메시지와의 차이점을 대별해 냈다. 그의 후계자
브레데는 바울을 기독교의 두 번째 창시자로 간주하여, 역사적 예수와 바울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다는 극단적인 주자이 내놓는다. 바울은 왜 '역사적 예수'의 행적을 보도하지 않는 것일까? 만일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울의 침묵이 의도적이었다면 무슨 이유 때문일까?
9.
신약성서 사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 사본은, 예수의 빈 무덤을 방문한 여인들의 두려움을 보도하고 있는 16장 8절에서 끝난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마가복음16장 9절부터 20절까지는 2세기에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마태나 누가, 요한의 복음과는 달리 '오리지널 마가복음'은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의 상봉 장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그토록 중요한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누락시킨 것일까?
10.
마태복음은 하늘나라를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개방된 종말 잔치에 비유하고 있다. 이러한 비유를 가능케 한 것은 문학적 상상력 이전에 배고픈 민중들의 현실이었다. 로마의 강압적인 수탈 체제 속에서 굶주리던 갈릴리 민중들이 함께 모여 식탁을 나누는 현실이 바로 예수가 묘사한 하늘나라이다.
하루를 연명할 양식을 구하려는 간구가 '주기도문' (마태 6;9~130에 삽입된 사실과,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수천 명이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에서, 민중들의 배고픈 현실을 극복하려는 변혁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11.
슈바이처는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가 곧 임박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이러한 기대 때문에 12명의 제자를 파송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마태복음 10장 12절을 근거로, 예수가 자신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선교를 완성하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종말은 오지 않았고, 예수는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12.
신약성서에 포함된 4권의 복음서는 하나같이 예수의 부활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사실 복음서의 예수이야기는 부활이라는 신앙 체험을 통해 과거의 예수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활이라는 강력한 신앙 사건이, 제자들이 예수를 '기억'하는 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그를 처형한 빌라도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했던 제자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 과학적으로 관찰 가능한 시공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예수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13.
사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만을 놓고 본다면 복음서의 기록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죽은 자의 부활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이나 그레코-로만 문화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의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에는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고난과 순교를 당한 사람들의 부활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한, 복음서에 예수와 첨예한 갈등을 벌인 것으로 묘사된 바리새파 사람들도 '몸의 부활'을 믿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레코-로만 종교에서도 신인(divine man)들의 부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가령, 디오니소스와 아폴로니오스의 생애는 여러 가지로 예수의 삶과 유사한 패턴을 가졌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그들 역시 예수처럼 살해 당한 후,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이 이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새로운 시대와 공동체를 개막했다는 것이다.
14.
초기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예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소수의 무리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새로운 종말론적 구원의 시작으로 예감했다.
유대의 예언자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그들은 부활 체험을 통해 믿었던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추종자들은 히브리 성서의 묵시문학적 전통 속에서 그의 부활을 이해하고 해석하였다.
15.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예수가 왜 자신들의 그리스도인지에 대해 다양한 문학 형식과 기법을 동원하여 표현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야기라는 문학 형식의 비유, 예언, 격언, 수난 이야기 등과 같은 다채로운 하부 장르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꾸민다.
이러한 변주의 이면에는 이면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다양한 삶의 정황이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힘겨운 환경 속에서 예수의 삶과 자신들의 삶을 연결시켜 이해했다.
16.
신약성서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라는 궁극적 실재를 경험한 고대인들의 반응이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언어는 당대의 인간 경험을 필연적으로 반영한다. 현재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은 신약성서의 문자의 내용에는 오류기 없다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과 성서의 모든 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에 쓰였다는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을 신봉한다. 이러한 태도는 신약성서의 문자 자체를 우상화할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종교 문헌으로서의 신약성서가 지니는 다채로운 의미를 축소시키는 우를 범하게 된다. 또한 자신들만의 교리적 시각으로 성서의 다양한 메시지를 전할 뿐, 신약의 본문들이 전하는 다양한 신앙적 경험들을 외면하게 만든다.
17
신약성서는 천국행 지름길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는 끊임없이 우리의 상식적 세계관을 전복하고 교란한다.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장소는 교회가 아니었다. 갈릴리라는 민중들의 고난의 현장이었고, 굶주린 이웃들이 그들의 작은 빵을 나누는 식탁이었고, 좌절한 제자들이 낙향하는 길 위에서였다. 즉 하나님 나라는 모든 소유를 팔아서 전적으로 헌신할 때만 가능한 실체로 드러나는 것이다.
《인류의 영원한 고전, 신약성서》 중에서, 정승우 지음, 아이세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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