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기본 골격의 본격적인 문제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분단체제 속에서 자라온 대한민국은 병영사회다. 국가정보원, 국군기무사령부 등이 적폐 정권의 온갖 비리와 부정에 연루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민큼 이 기관들이 막강한 재정 · 행정 자원을 동원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사회적 감시 · 견제도 받지 않고 불투명하게 운영되기 때문이다.
둘째, 초군사화된 사회는 동시에 여성혐오사회다. 물론 군사화만이 여혐을 낳은 것도 아니다. 군사화가 한국 총자본의 요구와 맞물려 있듯이 여혐도 자본의 논리와 결탁한다. 산업화된 세계 중 최악인 남녀 평균임금 격차는 여성에 대한 한국 자본의 젠더차별적인 초과착취 가능성을 의미한다. 바로 이와 같은 구조적 차별이야말로 여혐이 발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셋째,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자 노동지옥인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머슴'이다. 근대 고용노동의 개념은 법적으로 동등한 노동자 · 사용자 사이의 '노동과 노임의 교환'을 의미한다. 노동자는 하루 8시간의 노동시간을 팔 뿐, 그 외의 모든 문제에서 노동자와 사용자는 동등한 '시민'이다. 한데 갑질사회 한국에서 노동이란 근대적인 동등한 '거래관계'라기보다는 전통사회의 주종관계, 양반 토호와 겸종의 관계를 방불케 한다. 폭력 · 폭언 등 각양각색의 갑질은 인신예속 관계로서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의 성격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넷째, 이명박 · 박근혜 정권의 4대강 죽이기와 인허가 비리, 불법 청탁 등 각종 적폐 실책의 가장 큰 수혜자인 재벌들은 사회에 최대 해악을 끼치며 한국 사회를 좌우하고 있다. 재벌들의 경제 독점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재벌 대주주들이 계속해서 뽑아내는 이윤이 해외나 국내 부동산 시장 등으로 흘러들어가는 사이에 격차사회의 모순과 갈등 또한 심해졌다. 부유세가 없으면 '위쪽'의 경제적 팽창은 '아래쪽의 소득감소를 수반한다. 소득주도성장이라고? 재버왕국이 해체되지 않는 이상, 소득주도성장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 즉 재벌이 독점 지배하는 구조에 대한 본격적인 대수술 없이는 이 책에 서술한 각종 적폐들을 효과적으로 청산하기란 불가능하다. 한데 아무리 정궝이 교체되었어도 이 부분에 대한 진척은 여태까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대한민국은 위계와 서열의 사회다. 물론 어느 계급사회나 본질적으로 그렇다. 한데 군사주의 색채가 강한 개발주의라는 기본 바탕에 신자유주의적 격차사회가 겹쳐지고, 거기에 전통사회와 식민지 시대의 유산까지 곁들여진 대한민국에서느 위계서열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시피 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 못하는 애들, 못하는 애들이랑은 놀지 마라"는 부모의 말을 득고 성적이나 사는 집의 평수를 따져 친구관계를 맺는 이 사회에서는 위계질서적이 않은 관게를 찾기가 아예 힘들다. 우리에게는 '동료'가 아닌 '선배'와 '후배'가 있고, 급우가 아닌 '우등생'과 '열등생'이 있다. 은행 잔고, 아파트 평수, 전통사회의 한문과 식민지 시대의 일본에를 대체한 영어 구사력, 그리고 성별, 나이, 지위..... 이렇듯 여러 차원에서 온 나라가 '줄;을 세우고 있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그런가? 타자에 대한 시각 역시 철저히 차별적이다. '선진국', 즉 부국 출신인지 아니면 '후진국' 즉 빈국 출신인지가 한국에 사는 외부자의 삶을 결정짓는다. 재미교포와 재중교포에 대한 태도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해외 교민 · 동포에 대한 위계질서적 차별도 마찬가지다. 갑질이 생기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로 그 기본 골격부터 잘못된 구조다. 이런 구조에서는 이윤을 뽑기는 쉬워도 행복하게 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테마 중 하나다.
일언이폐지하자면, 대한민국은 극도록 불행한 사회다. 전체 사회가 성장과 이윤의 논리대로 움직이면 당연히 올 수 박에 없는 결과다. 우리 대한민국이 세계 최악에 가까운 자살률과 최저에 가까운 출산율을 자랑(?)하는 것이 과연 우연인가? 한국의 성장주의가 많은 면에서 일본을 닮았으며 한국의 신자유주의가 미국의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다지만, 한국의 자살율은 미 · 일보다 높으며, 한국의 출산율은 미 · 일보다 낮다.
인간 행복의 조건은 단순하다. 남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평등하게 살고, 소비를 조금 덜 해도 생계가 아닌 자아실현을 위해 노동을 하고, 폭력 · 폭언을 당하지 않는 존엄한 삶을 살며, 불안에 떨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가 비경쟁적이고 수평적이며 생계를 강력하게 보장하고 자아실현의 기회를 많이 부여할수록 개개인의 주관적 행복지수가 확 오른다. (머리말 중에서)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나는 언제 행복감을 느끼는가 하면,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는 외출시 집 출입문을 잠그지 않고 나갈 때다. 직장에 가는 경우라면 잠그고 가야 하지만, 고작 몇 시간 집을 비울 때는 굳이 그렇 필요를 못 느낀다. 노르웨이가 복지국가인 만큼 범죄율이 낮기도 하거니와, 나는 내 지역에서 사는 이웃을 충분히 믿기에 굳이 누군가의 범의를 의심하여 문을 잠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웃을 믿고 살 수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행복감이다. (281쪽)
《전환의 시대》,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발간
'책을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든 (0) | 2022.03.23 |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편지 (0) | 2022.03.15 |
토마스 페인, 이성의 시대 (0) | 2019.02.24 |
유발 하라리 (0) | 2018.08.30 |
소로우의 일기 (0) | 2017.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