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鄭光弼)의 여유
기묘년(1519년) 11월에 공(鄭光弼)은 영의정이 되었는데, 때마침 남곤이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어진 이를 모함하려고 남 서방이라 일컫고는 초립을 쓰고 옷을 거칠게 입고 떨어진 신을 신고 걸어서 공의 집에 이르러 지나가는 길손이라 말했다.
하지만 문지기가 그 모습을 살펴보고 남곤임을 알아차리고 들어가서 “손님이 문 앞에 와 계신데, 그 모습을 보니 바로 남 판서 입니다. 그러나 의관이 남루하여서 천한 사람 같습니다.” 하고 알렸다.
공이 깜짝 놀라 허둥지둥 나가보니 역시 남곤 이었다. 공이 괴이하게 여겨 “공이 어찌 된 일이오?” 하고 묻자 남곤이 그 까닭을 갖추어 말하였다. “이 무리들을 한 사람이라도 남겨두면 해를 끝없이 미칠 것이므로 반드시 남김없이 제거한 뒤에라야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오.”
그리고 험한 말로 공갈하여 마음을 움직이려 하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꾀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공은 정색을 하고서 “공이 재상으로서 천한 복장을 하고 서울 거리를 거쳐서 온 것도 놀라운 일인데, 사림을 모해하고자 하는 것은 조금도 내 마음에 없는 일이오” 라고 하자 남곤이 노하여 옷을 털고 가버렸다.
조금 있다가 부름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 보니, 남곤이 이미 그 일을 만들어 일망타진할 계획을 짜고 형틀을 뜰에 갖추어 놓고 있었다. 공이 입시하여 두 볼에 눈물을 흘려 옷소매를 다 적시면서 “나이 어린 유생들이 시의(時議)를 모르고 성급하게 옛 것을 끌어다가 오늘날에 베풀고저 한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고 간하였다.
임금이 갑자기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자 공이 쫓아가 임금의 옷자락을 당기며 머리로 땅을 두드렸으나 마침내 조광조들을 옥에 가두라는 명이 내려졌다. 공이 좌의정 안당(安瑭)과 의론하여 조정 신하들과 더불어 거듭 변명하고 구제하여 마침내 차이를 두기는 했지만 귀양 보내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12월에 대사헌 이항(李沆)과 대사간 이빈(李蘋) 등이 그들에게 형벌을 더 무겁게 주어야 한다고 다시 주장하자 공이 극력 반대하는 주장을 폈다. 그 일로 드디어 남곤과 틀어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좌천되었다가 정해년(1527년)에 남곤이 죽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정승이 되었다.
계사년(1533년)에 김안로가 집권하자 또 다시 정승자리에서 파면 당했다. 김안로가 공이 희릉(禧陵)의 총호사(總護使) 였을 때의 일을 트집 잡아 공을 죽이려 하였으나 임금이 김해로 귀양을 보내라고 명하였다. 공이 가는 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 희릉 :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
* 총호사 : 조선시대 때 나라의 초상을 주관하도록 하려고 임시로 임명한 벼슬아치
“비방하는 말 쌓여서 태산 같았으나 마침내 죄를 용서받았으니, 평생에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네. 높은 고개 열 번 오르며 두 볼에 눈물 흘렸고, 큰 강을 세 번 건너며 넋을 잃었지. 막막한 높은 산에 구름이 먹을 뿌리자 망망한 넓은 들엔 비가 동이물 쏟듯하네. 날 저물어 바닷가 동쪽 성밖에 여장을 푸니, 쓸쓸한 초가집 대나무로 문을 만들었네”
당시에 이행(李荇)도 관서로 귀양을 갔는데, 김안로가 두 공에게 글을 보내 “일찍 자결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자 공이 웃으며 “조정의 늙은 신하가 죄를 지으면 마땅히 나라의 법에 따르는 것이 옳거늘, 그가 어찌 나를 죽일 수 있으랴” 하고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정유년(1537년)에 김안로가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되자 임금이 공을 영중추부사로 다시 불렀다. 심부름꾼 아이가 그 기별을 가지고 사잇길을 곱이나 빨리 달려서 한밤중에 귀양지에 도착했는데 쓰러져서 말을 못했다. 자제들이 주머니를 뒤져 찾아보니 바로 기쁜 소식이라 곧장 여쭈었다.
그런데 공은 “그러냐?” 하고는 계속 코를 골며 달게 자고는 이튿날 아침에야 그 글을 보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날 서울 사람들이 손을 이마에 얹으며 반겼는데 얼마 뒤 죽어서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충성되고 미더우며 사람 사랑함을 ‘문’이라 하고 생각이 깊고 먼 것을 ‘익’이라고 한 것이다. 공이 죽던 날 환한 빛이 집에서 똑바로 하늘로 올라갔는데, 마치 무지개 같았다.
<해동잡록 海東雜錄>
* 정광필이 한양으로 돌아오던 날,
한양의 모든 상가는 문을 닫고, 백성들은 귀양에서 돌아오는 정광필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정광필을 비롯한 동래 정씨 후손들은 대대로 남산 기슭 '회동'에서 살았는데
지금의 회현동에 있는 우리은행 본점 자리입니다.
그 당시 정광필 집마당에는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지금도 은행나무는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회현동의 유래는 정광필 등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회동이라는 명칭이 '회현동(會賢洞)으로 바뀌었는데
회현동 지하철역에 가면 그 유래가 동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