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그리고 논산훈련소의 추억
1
.작년에 전국적으로 치른 학업성취도 결과에 대해 나라가 어수선하다. '임실' 이라는 산골마을 아이들의 실력이 전국 1위로 나오자 정부와 일부 신문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들의 주장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입맛에 딱 맛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성적 조작 등 집계에 오류가 있었다는 웃지 못할 보도가 나왔다.
현재 대구, 전주, 부산 등 다른 지역에서도 성적 조작 등의 오류가 속속 보도되고 있다. 아마도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에서 이와 비슷한 오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와서 교과부는 뒤늦게 다시 조사를 하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지난 번 치른 일제고사는 당초 시험을 치를 때부터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교육부는 각 학교 자체별로 시험을 치르고 채점해서 결과를 보고하도록 했다. 이렇게 실시하여도 아무런 부정없이 시험과 채점이 원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했다면, 교과부 공무원들이 순진하거나 아니면 무능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쩌면 교과부가 사전에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 정부의 '속도전'에 맞추어 무리하게 추진하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지난 번 일제고사 보는 날 학생들에게 체험학습을 허락하여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장수중학교의 김인봉 교장 선생님은 '성적이 제일 낮은 학교가 가장 정직한 학교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
나는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양심 고백을 하고자 한다. 나도 부정시험을 치른 적이 있다. 부정시험의 공범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부정시험을 치른 곳이 학교가 아닌 '논산훈련소' 였다.
처음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였을 때는 육제적으로 무척 힘이 들 줄 알았다. 강인한 군인을 배양하기 위해 '빡센 훈련'을 받게될 줄 알았다. 내가 상상하는 훈련소는 매일 완전 무장 구보에 각개 전투를 하고 고지를 점령하는 훈련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조교들의 훈련 목표는 오직 훈련병들이 '측정'이라는 시험에 좋은 성적을 얻는 데 있었다.
훈련소에 입대하여 4주가 지나면 훈련이 끝나고 배출하게 되는데, 그때 '측정'이라는 시험을 보게 된다. 그리고 중대의 측정 결과가 몇 %가 나왔는지가 오로지 큰 관심사였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측정 점수가 중대장의 인사고과에 바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중대장, 소대장과 조교들은 그야 말로 측정 점수를 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였다. 훈련이 마치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 듯, 측정에 맞추어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측정은 필기시험과 실기시험 2가지를 치르게 되어 있었는데, 필기시험에 대비해서 전 훈련병들이 잠을 자지 않고 보초수칙 등을 외우고 또 매일 모의 시험을 보았다.
측정을 하루 앞둔 어느 날 저녁, 각 소대에 전령이 하달되었다. 각 소대에서 필기 시험 점수가 가장 좋은 훈련병 4명씩을 차출하라는 것이다. 나도 그중 한명으로 차출되었다. 조교 한 명이 차출된 훈련병들을 어디로 데리고 갔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리 중대보다 하루 먼저 배출되는 옆 중대였다. 그날이 그 중대의 필기시험 측정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는 그 중대에서 필기시험에 가장 자신이 없는 훈련병들과 옷을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과 군번을 적고 필기시험을 대신 보아 주었다. 시험을 대신 치른 16명의 훈련병들은 중대에 돌아와서 각자 기억하고 있는 시험 문제를 소대장에게 말했다.
우리가 기억해 낸 시험문제는 즉각 답을 달아서 전 중대원에게 하달되었다. 그날 밤 전 중대원들은 예상 문제를 외우고, 다음 날 필기시험을 치렀다. 아마 시험 결과가 아주 좋게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중대장은 인사고과에도 상당한 이익을 받았을 것이다.
경쟁이 있으면 누구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경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승진이나 금전적 보상과 연결된다면, 누구나 부정을 해서라도 좋은 성적을 얻으려 할 것이다. 더구나 이번 일제고사처럼 시험과 채점 과정이 허술하게 관리되었다면 부정의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교과부의 졸속 행정이 교육 현장의 많은 학생과 선생님들을 힘들게 하고 또 본의 아니게 도덕불량자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
3.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대신 체험학습을 허가하였다고 하여, 졸지에 교직에서 파면된 선생님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일까? 교사가 교육적 양심에 따라 한 행동으로 인해 파면을 당하였는데도 대다수 동료 선생님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세상이 무서워진다. 이것이 민주화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일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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