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이승만 연구

지금 여기서 이렇게 2010. 8. 31. 15:57

1.

해방 후 정부는 수립되었지만 이승만 정부는 독립유공자를 표창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에 따르면 1949년 4월 27일 건국공로훈장령이 대통령령 제82호로 제정 공포되었는데, 그해 서훈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부통령 이시영 단 두 명뿐이었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이승만 대통령 혼자 받으면 비난이 일 것 같아 이시영 부통령을 끼워 넣은 것이라는 말까지 돌았다. 이후 1960년 4.19혁명으로 무너질 때가지 단 한 사람의 독립유공자도 표창하지 않았다. 도리어 일제의 주구로 독립운동자를 박해하던 민족 반역자를 중용해 많은 항일투사의 울분과 애국지사의 비난만 들끓었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338쪽, 이덕일 지음 - 

 

2.

이승만은 13세이던 1887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거의 해마다 과거에 응시했다. 그리고 1895년에 배재학당 영문부에 입학했다. 3살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그가 21세가 되어서야 신교육을 향한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그는 출세할 길을 찾았을 뿐이다.

 

이승만의 유학 기간 중 향후 그의 정치 노선을 짐작하게 할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1904년부터 일본에 고용되어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일하던 미국인 D W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가 기자 회견에서 일본의 통감 정치를 찬양하고 옹호하여 한국 교민들의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08년 3월 23일 두 명의 교민 장인환과 전명운이 각자 스티븐스를 살해하려고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그를 공격, 살해한 '스티븐스 사건'이 일어났다. 교민 사회 간부들은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에게 두 사람을 위한 통역을 부탁했는데, 그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는 학생 신분이며, 기독교인으로서 살인범을 도와줄 수 없다는 이유로 통역 일을 거절했다.

 

이승만 '외교 독립 노선'의 성격은 스티븐스 사건에서 드러났다. 는 언제나 현시욕이 강한 출세주의자였고, '외교 독립 노선'은 그를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다. 그렇게 보면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함을 걸고 미국의 신탁 통치를 청원한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힘들여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처신해서 직함을 따내고, 그 직함을 이용해 예속 상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예속 상태로 바꾸는 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해방 후까지도 그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예속상태를 계속 찾고 있었다.    

 

- 김기협 / 역사학자/프레시안  (2010.10.19) -

 

3. 

그가 대통령에 있을 때 그의 생일은 국경일이었다. 그의 84회 생일은 동대문 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열렸는데 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어 마스게임을 하기도 했다. 당시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밤에만 전력이 공급되었는데 생일날에는 온종일 공급되는 등 전국에서 축하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그의 동상이 나라 곳곳에 건립되었는데 김일성 동상 보다 더 컸다.

 

4. 

제헌국회에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로 시작했으며, 목사출신 국회의원이 집전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했다. 

 

5.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이 목적을 추구하며 자신의 출세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비밀 해제된 미국 CIA 보고서 <Personality of Rhee Syngman, 1948. 10. 28> 중에서 

 

6.
"이승만은 미국에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실현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 Robert. T. Oliver (이승만 정치 고문),  박태균 저 <한국전쟁> 283쪽에서

  

7. 이승만은 독립운동의 훼방꾼이었다.

이승만이, 적어도 해외에서는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는커녕 훼방꾼이었다는 사실을 여기서 밝히고자 한다.

 

1945년 4월2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회의가 열려 유엔 헌장이 채택되고 이에 따라 유엔이 창립됐다. 이 회의 참석국들은 거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쪽에 가담했던 국가였다. 특히 영토가 독일 점령 아래 있던 런던의 망명정부들도 대부분 회의에 초청되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장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도 초청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임시정부에서는 대표단을 구성했다. 단장은 부주석인 김규식 박사, 부단장은 조소앙 외무부장, 단원은 정환범 차장으로 이들 3인은 중국 정부에서 발급한 여권도 받았으며 중국 정부로부터 경비로 사용할 달러 대부승인까지 받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국무부는 재미 한국인 대표도 이 대표단에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재미 한인 대표로 이승만·김용중·한길수 3인을 선정했다. 이들을 임정 대표단에 합류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 3인은 서로 반목하는 사이였으나 김용중과 한길수는 국무부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이들과 함께 대표단에 참여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대표단 참석이 무산됐으며 한국이 유엔의 창립회원이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만약 이때 한국이 유엔의 창립회원국이 됐으면 개별적인 국교 수립 없이 유엔 회원국들의 승인을 자동적으로 받는 것이기에, 임시정부는 해방된 조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 결정도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일 수 있는가. 그야말로 황당한 발상이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 한겨레신문 (2013. 9. 24) -

 

 

8. "내 국적은 일본"  이승만 미국 체류시절 자필로 일본 국적 표기 

 

1차대전 징집카드 자필 작성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고 있는 가운데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최근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뉴욕=뉴시스) 노창현 특파원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돼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징집서류에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다. 이 카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것으로 당시 44세이던 그는 음력생일(3월 26일)과 함께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주소는 ‘하와이’로 돼 있다.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중엔 1933년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을 비롯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됐다. 사진은 이승만의 ‘제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  

<사진=뉴욕한국일보 제공> robin@newsis.com

 

 


      사진은 이승만의 1933년 뉴욕 입항기록.  <뉴욕 한국일보 제공> 

 

이와 관련, 뉴욕한국일보는 이 서류는 '제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문 이름'(Syngman Rhee), '생년'(1875년) 등과 일치하는 연방 문서 60건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필기체로 작성한 이 카드엔 나이(44세)와 음력생일(3월 26일)과 직업은 '한국학교 교장'(Korean School Principal), 하와이 거주 주소 등 인적사항들이 나와 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이 심(Shim Rhee)으로 관계를 '누이(Sister)'로 한국 주소와 함께 작성했고 인종은 '아시안(Oriental)'이라고 표기했다.

놀라운 것은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국적을 '일본'(Japan)으로 기재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강제합병으로 식민지 국민으로 전락한 시점이기는 하지만 하와이 등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펼친 그가 신상 정보난에 국적을 일본으로 밝힌 것은 적잖이 흥미롭다.

1차 대전 징집 자원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징집 카드는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18~45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시민권자는 물론 미국에 거주하는 모든 외국남성들을 포함, 미 전역에서 약 2400만명이 카드에 자신의 개인정보를 수록했다. 현재 이 징집카드는 '셀렉티브 서비스(Selective Service)'란 이름으로 만 18~25세 남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가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시점에서 아시아의 열강인 일본의 국민으로 신상정보를 기록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등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그가 미국의 공문서에 '일본인'이라고 밝힌 것은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논란거리인 그의 '친일성향'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8월4일, 이승만은 하와이의 윤병구 목사와 함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담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이승만이 고종 밀사로 파견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됐지만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 등 미국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과 윤병구는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적극 부정했다. 1904년 결성된 일진회는 이듬해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을 적극 찬성하는 등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친일단체로 성장했다.

뉴욕헤럴드 트리뷴은 "러시아 사람들은 줄곧 적이었고, 우리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있는 것에 기뻐한다"는 윤병구의 말과 함께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들은 일본을 주인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고문서중엔 1933년 이 전 대통령의 뉴욕 입항 기록도 있다. 1933년 유럽 방문 후 프랑스에서 출항한 '렉스'호에 올라 뉴욕항을 통해 미국에 입국한 기록이다. 이 입국 서류에 나타탄 이승만의 직업은 '박사, 교수'(Doctor, Professor)였고, '영어를 읽고 쓸 수 있냐?"는 질문란에 '그렇다(Yes)'고 돼 있다. 인종은 '한국인'(Korean), 출생지는 '한국(Korea), 서울(Soeul)'로 작성됐다.

 

그밖에 필리핀과 일본 등을 출발해 하와이 호노룰루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등에 도착한 다수의 입항기록과, 육로를 통해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입국기록 등이 함께 발견됐다.

 

- 뉴시스 노찬현 뉴욕특파원 (2013. 10. 5) -

 

 

*****

이승만이 여권에 자신의 국적을 "Japan"이라고 표기한 것과는 반대로

100년 전 프랑스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들은 국적을 "Korea"라고 표기하였다.

 


 

 

 

 

프랑스 기록에 남은 100년전 쉬프의 한인노동자들 명부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국적을 "한국인(Coreen)"으로 적고 있다

 

 

9.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햤다. 소련제 T-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물밀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ㅘ 김포공항을 포격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낙시를 즐기고 있었다. 군수통수권자인 대통령이 북한군의 전면남침 보고를 6시간 뒤에야 받은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7시간 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듯이, 이숭만은 국난의 시간에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그나마긴급 국무회의는 전쟁발발 10시간이 지나 오후 2시에 열렸다. 


- 《역사의 절망을 넘어》 중에서, 김삼웅 지음, 꽃자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