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而不同

리영희 선생의 종교관

지금 여기서 이렇게 2011. 2. 11. 23:16

 

나는 아직까지는 신앙으로서의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직까지는라고 말한 까닭은 내 나이가 올해 예순다섯인데, 더 나이가 들게 되면 장담할 수 없다는 뜻에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무종교로 살다가 죽음에 임박해서 무슨 거사무슨 베드로니 또는 무슨 신도로 둔갑할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렇게는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어주고 불러준 그대로의 이름으로 생명의 위대한 어머니 땅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489)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예수와 부처의 사상과 행덕을 기리는 데는 남에게 빠지지 않으려는 사람이지만, 그 두 분의 이름을 빌려서 행해지는 제도화된 종교와 종교형식은 경멸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그렇게도 추악할 수 있을까? 세속권력과 돈의 노예가 된 종교들! 어쩌면 그렇게도 잔인할 수 있을까?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잔인무도한 행위를 본 뒤로는 차라리 신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491)

 

나는 마르크스처럼 종교가 반드시 계급적 아편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프로이드처럼 종교는 기가 약한 사람들의 환상이라고 멸시하지도 않는다. 그렇기는 하지만 인간이 나고, 병들고, 괴로워하고, 죽어야 하는 동물인 까닭에, 가지고 싶은 것을 빠짐없이 누릴 수 있는 경지, 병이라는 것을 앓을 줄 모르는 상태, 오로지 행복하고, 평안하기만 한 삶, 한번 나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인생과 같은 염원을 관념화하여서 그것에 신, 하늘나라, 또는 극락의 이름을 붙였으리라는 정도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나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세를 경시하는 종교 일반의 교리와 사상을 이해할 수가 없다. 육체가 밟고 살아가야 할 땅은 지옥이고, 하늘 어딘가에 천당이나 극락이 있다는 발상부터가 황당무계하다. 우주를 둘로 나누어서 하늘에 신성(神性)과 영원을 부여하고, 땅을 추악함과 순간으로만 여기는 사상부터가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가 신을 창조했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오히려 논증하는 결과가 된다. 하늘거ㅏ 땅은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다만 하늘에 신성을 부여한 것은 고대인에게 하늘은 경코 오를 수 없는 곳이며, 천둥번개가 치는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곳이기 떄문이었다. 과학은 그 불가사의를 해명하게 되었다.

 

적어도 초월자와 절대자의 정신에 충성을 맹세한 수도자는, 자기가 먹고 입을 것을 남의 보시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육체와 땀으로써 직접 공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중국 선문총림의 백장선사(百丈禪師)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 삶으로 유명하다. 그에게 노동이 바로 수행이었다. 나는 노동과 수행을 하나로 통일시킨 신앙생활이 아니면 위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성당이나 교회나 사찰의 외형적 크기가 크면 클수록 위선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아직 성당이나 교회나 사찰에 가지 못하고 있다. (493)

 

리영희 평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