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깨다. Breaking The Spell
1.
"<부정적>이란 말은 대개 인식론적 부정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그것은 단지 궁극적 실재는 - 비록 그 자체는 지적이고 심지어 극상으로 지적일 수 있지만 - '형언할 수 없다 ineffable'는 것, 인간의 지능은 그것을 파악할 수 없고 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가정한다.
이때 인식론적 부정성은 단지 우리와 관련해서만 궁극적 실재의 형언 불능성을 의미한다. 반면에 불교의 부정성은 이 형언 불능성을 궁극적 실재의 핵심까지 끌고 들어가, 이 실재가 - 그 로고스(그 표현과 소통)는 더 이상 궁극적 실재의 질서에 속하지 않고, 정확히 그 질서의 외현에 속하므로 - 단지 우리와 관련해서만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형언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부정성은 실체적 부정성이다." <불교에 관한 라이문도 파니카의 글, 1989, p14>
나는 이 주장이 과학자들이 하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은 물질은 단단하고 작은 입자들(원자)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질은 그보다 훨씬 더 이상한데 과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물질이라 부른다.
물론 물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주로 물질은 무엇이 '아닌지'를 알지만 말이다. 그들은 여전히 그것을 물질이라 부르지만, 더 이상 그것을 '원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들은 원자 개념, 물질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만일 그들에게 이제 물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으면, 그들은 신비한 어떤 것이라고 고백할 것이다. 그들의 개념 역시 부정적이다! 물리학자들이 구체성에서 신비로 이동할 수 있다면, 신학자들 역시 그럴 수 있다.
2. 상자 속의 딱정벌레
모든 사람이 각자 상자 하나식을 가지고 있고, 그 속에는 우리가 '딱정벌레'라고 부르는 것이 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는 오직 '자기의' 딱정벌레를 봄으로써만 딱정벌레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말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상자 속에 다른 사물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물이 계속해서 변한다고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람들의 '딱정벌레'라는 낱말이 어떻게든 사용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한 사물의 명칭으로서의 사용은 아닐 것이다. 상자 속의 사물은 그 언어 놀이에 전혀 속하지 않는다. '어떤 무엇'으로서 조차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상자는 비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상자 속의 이 사물에 의하여 '나눗셈'을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약화되어 없어져 버린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중에서 -
《주문을 깨다》 대니얼 데빗 지음, 김한영 옮김, 최종덕 해설, 동녁사이언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