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무하유(無何有)
장자와 더불어 마음을 놓고[放心] 이리저리 노닌다[遊心]. 아득하게 깊은 산중이다. 오직 바람소리, 새소리뿐이다. 눈을 감는다. 온몸이 저려 온다. 산은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다. 허울 좋은 일들, 사람의 일들을 잊으라고 한다. 어느새 솔씨 하나, 작은 새 한 마리, 그리고 바람과 구름 한 조각씩 몸 안으로 들어와 산이 된다. 이윽고 하늘의 소리[天뢰]가 온 산에 가득하다.
사람은 보다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변화에 잘 순응할 수 있다. 스스로를 보는 눈이 메추라기처럼 비좁다면 천지 본연의 모습을 어찌 따르겠는가. 무엇에 의존[所待]을 줄여야 한다. 발걸음이 무거우면 쉽게 움직일 수 없다.
뱁새가 깊은 산속에 둥지를 튼다 해도 나무가지 하나면 족하다. 두더지가 목이 말라 강물을 마신다 해도 그 작은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다. 사람도 살아가는 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자기의 분수에 맞게 자족(自足)해야 한다. 그러면 허명(虛名)을 구하고 손님을 찾으려 죽기 살기로 애쓰지는 않게 된다.
장님은 아름다운 무늬를 볼 수 없고, 귀머거리는 종소리나 북소리를 들을 수 없다. 장님과 귀머거리는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도 있다.
소요(逍遙)는 자유라는 본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누구나 소요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일상에서는 이 본능이 억압받으면 삶이 활기를 잃는다. 진정한 즐거움도 사라진다. 소요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연에 순응해야 한다. 자연을 따르고 자연의 변화와 함께 하면 자연 그대로의 자유라는 본성을 유지할 수 있다.
바람은 대지의 숨결이다. 이것이 몸에 닿으면 지친 심신이 상쾌해진다. 또한 그 아름다운 음향으로 영혼이 맑아진다. 그러나 그 모습은 볼 수 없다. 나무가 흔들리거나 파도가 일어나고 계곡이 울릴 때, 그것이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한적한 산능선에 우뚝 서 있는 소나무 밑에 누워 눈을 감는다. 소나무가 내는 소리(松뢰)가 예사롭지 않다. 저 멀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조물자(造物者)의 메시지(天뢰뢰)인가. 문득 느껴진다. 모든 것의 근원은 하늘에 있으며, 하늘은 모든 사물과 현상을 차별 없이 대한다는 것이다.
사물은 본래 그래야 할 것이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도 사람은 자기의 입장에서 사물을 구별하려고 한다. '그렇다. 그렇지 않다' 하면서 구별하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면서 구별한다. 문둥병 환자와 서시(西施)는 누가 더 예쁜가. 사람들은 서시가 예쁘다고 하지만, 서시가 다가서면 새는 도망가고 물고기는 숨어버린다.
모든 구별을 현상의 문제이고 또한 인위적인 관점의 문제이다. 현상을 초월하는 절대의 입장에서는 무차별이다. 도(道)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이 통하여 하나가 된다.[道通爲一]. 천지도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도 한 마디의 말이다[天地一指 萬物一言].
한쪽에 치우친 편견이 심한 사람은 사물을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실은 모두 하나임을 알지 못한다[朝三]. 늘 시시비비를 가리면 사물과 자아 사이에 장애가 생겨서 조화를 이를 수가 없다.
사람의 지식이란 얼마나 제한적인가.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자면 병이 생기지만 미꾸라지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나무 위에서 자면 무서워서 떨지만 원숭이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사람과 미꾸라지, 원숭이 중에서 누가 올바른 거처[正處]를 알고 있는 것이가.
삶을 기뻐하는 것이 미혹(迷惑)이 아닌지를, 또한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것이 아닌지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내가 알고 있다고 해도 사실에 있어서는 알지 못하는지 어찌 알겠는가. 내가 모른다고 해도 사실에 어서 알고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
인생은 커다란 꿈이다. 사람은 모두 꿈을 꾸고 있다. 꿈속에서 술을 마시던 자가 아침에는 슬피 울기도 한다. 꿈속에서 울던 자가 아침에는 즐겁게 사냥을 나서기도 한다 꿈을 꿀 때는 그것이 꿈인 줄 모른다.
같은 것을 두고도 어떤 사람은 옳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한다. 각자가 자기의 입장에서만 판단하며, 입장이 바뀌면 견해도 달라진다. 마치 맷돌이 돌아갈 때 시작과 끝이 없듯이 시비는 입장에 따라 한없이 교차될 수 있다. 그래서 대립적인 시비의 논의는 불안정한 것이다. 인위적으로 시비를 판단하지 말고, 대랍을 근원적으로 초월하는 자연의 길[天倪]로써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연적인 변화[曼衍]에 그대로 맡김으로써 가능하다.
사람의 생사(生死)는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본분(本分)이다. 그러니 단단한 밧줄로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이 사람의 생사다. 생사는 자연의 도리와 순리에 따라 진행된다.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어쩌다가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죽는 것도 어쩌다가 때를 만난기 때문이다[適來適去]. 그러넫도 어찌하여 주검을 앞에 두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말하고 넋을 잃듯이 곳을 하는 것인가. 하늘을 등지는 둔천(遁天)이다.
안시처순(安時處順)할 일이다. 이때나 저때나 편안한 마음으로 눈앞의 것을 받아들이고 순리대로 따른다. 그러면 슬픔이나 기쁨의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이것이 하늘에 거꾸로 매달렸다가 풀려나는 현해(縣解)의 경지이다.
심재(心齋)하라. 마음속이 그 무엇들로 가득 차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몸은 한 곳에 있어도 마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뛴다. 이것이 좌치(坐馳)이다. 가지수양이란 좌치의 병을 고치는 것이다.
저 텅 빈 방을 봐라. 눈부신 햇살을 받으니 얼마나 환하고 고요한가. 마음도 저 방처럼 돼야 한다. 터 빈 마음은 기(氣)로만 가득 찬다. 기란 바로허(虛) 그 자체이다. 여기에 도(道)가 깃든다. 그리하여 도와 하나가 되니 자연스럽게 만물과 융합한다.
세상에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서물은 없다. 과연 무엇이 쓸모 있고 또 무엇이 쓸모 없는지 어찌 알겠는가. 사람들은 쓸모 있음의 쓸모[有用脂用]는 알고 있어도,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른다.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는 고요함이 있다. 이것을 영녕(寧)이라 한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 안팎으로 이리저리 밀리다가도 끝내는 안정된다. 모든 변화 뒤에는 반드시 안정이 찾아든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 거역하지 말고 잘 순응할 일이다. 저 파도 속의 고요함, 저 혼란 속의 고요함을 봐라. 영년때문에 생사를 초월하고 생사를 지배하는 것도 가능하다[殺生者不死, 生生者不生].
《장자의 무하유》 중에서, 자은(自隱) 이수오(李壽晤) 지음, 동학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