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종교의 두 얼굴

지금 여기서 이렇게 2015. 2. 21. 22:14

1.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다. 게다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마 황제와 고관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고 로마제국 주류 종교로 변모했다. 이 무렵부터 로마제국과 대립적 구조 속에 형성되었던 초기 기독교의 반문화적인 신앙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기독교 내부에서 초기 기독교가 대망하던 종말론적 기대와 그리스도 재림에 대한 소망이 점차 약화되었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보다 로마제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자 일련의 신학자들은 로마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간주했다.


기독교의 사회적 위상이 바뀌고 종말론적 신앙에서 벗어나 역사에 대해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되면서 변화는 시작됐다. 3세기경부터 종말론적 관점에서 평화주의적으로 글을 쓰던 이들의 의식에서 종말론적 희망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2.

1541년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칼뱅은 성서적 근거로 교회의 직제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여 목사, 교사, 장로, 집사라는 네 직분을 교회에 두었다. 네 직분 중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진 것은 장로였다. 장로의 직임은 모든 시민의 생활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12명의 장로와 목사로로 구성된 종교법원을 만들고 모든 시민의 신앙생활을 감독하도록 했다. 종교법정은 칼뱅파의 주도하에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칼뱅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칼뱅의 개혁사상과 운동은 루터의 운동보다 훨씬 공격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거룩한 도성 제네바를 꿈꾸었던 칼뱅은 거룩하지 못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인구 12,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 제네바에서 칼뱅의 실질적 지배 아래 있던 5년 동안(1542~1546) 78명이 추방당하고, 당대의 저명한 인문학자 세르베투스를 포함해 58명(교수형 13명, 참수형 10명, 화형 35명)이 이단, 간통, 신성모독, 마술 행위로 몰려 처형당했다. 칼뱅이 세력을 장악한 후 제네바에서 이교도나 이단자로 몰린 이들이 거의 한 달에 한 명씩 잔인하게 처형당했다거룩한 도성을 일구려던 인간들의 의지는 마침내 제네바를 종교의 관용이 없는 도시로 만들었다.  


3. 

네덜란드의 재세례파의 지도자로 평화주의 원칙을 밝힌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는 여러 글에서 재세례파의 평화주의 원칙을철저한 무저항 정신으로 규명하고 이후의 모든 재세례파의 신앙적 삶의 지침을 명시했다. 시몬스를 따르는 재세례파 신도들은 그의 이름을 따라'메노나이트'로 불리기 시작했다. 


메노나이트의 평화주의적 태도는 한도안 정부의 권위를 거절하는 열광적 무정부주의자로 간주되어 개신교, 가톨릭교회, 그리고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 약 2,000명에 이르는 재세례파 교도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4.

퀘이커 전통은 국교화되어 경직된 영국 교회에 절망한 평신도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시대의 영국 국교회는 영국 왕실과 귀족의 옹호를 받으며 가톨릭교회가 누리던 모든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겪던 헨리 8세는 1534년 수장령을 선포하여 영국령에 있는 모든 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독립해 영국 국왕의 통제하에 처하도록 조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왕좌에 오른 에드워드 6세는 개산교를 지지했지만 재위기간은 6년밖에 되지 못했다. 다시 왕좌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옹호하던 메리 여왕에게 넘어가 5년간 피비린내 나는 종교적 숙청이 일어났다. 메리 1세가 통치한 5년간 280명이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5.

어느날 폭스는 펜들힐(Pendle Hill)에 올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깊은 좌절을 깨고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성직자나 전문 신앙인이 답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는 음성이었다. 폭스는 펜들힐 경험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체험하며 꺠달을 수 있는 '내면의 빛'을 지녔다고 믿게 되었다. 어떤 매개적 수단보다 내면의 빛을 통해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직접 나눌 때 비로소 인위적인 장애를 넘어 참된 신앙에 이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존귀한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제도나 권위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은 그에게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서 언급하듯, 모든 인간은 서로를 향해 벗이 될 뿐 결코 노예가 아니라는 성서적 의미에서 퀘이커의 모임을 '벗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퀘이커 모임에는 성직자가 없다. 탈성직주의, 탈교리주의, 탈권위주의적 신앙인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내적 체험으로 만나고, 그 하나님과 일상에서 교제를 나누는 신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타율에서 벗어나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6.

퀘이커들을 가장 괴롭힌 이들은 바로 호전적인 청교도 목사들이었다. 폭스는 여덟 차례나 투옥되었고, 재판정에서 여러 번 신문을 받았다. 론서스턴(Launceston) 감옥에서 재판받는 동안 폭스는 시기와 질투가 넘치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진면목을 경험했다. 폭스의 평화 사상에 동의하는 신앙적 벗들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전율하는 신앙인으로 해명했고, 재판관들은 이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퀘이커'라고 불렀다. 


7.

퀘이커들은 비폭력 평화주의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사상과 삶의 통전성(Integrity)을 중시한다. 그들은 살의 네 가지 기본 원칙에 대체로 합의한다. 평등성(equality), 단순성(simplicity), 조화(harmony) 공동체성(community)이다, 퀘이커들에게 이런 요소들에 버금가게 중요한 것은 경쟁 관계를 거부하는 삶의 태도와 정직성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영적인 감수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기 떄문에 이중적 삶의 태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8.

퀘이커들은 18세기 이후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평화를 위한 봉사에 크게 기여했다. 사람은 하나님과 영성의 교제를 나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생각에서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인종이나 성, 종교와 국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행하는 모든 차별을 거부하고 평등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퀘이커들은 1727년 공식적으로 노예 폐지를 주장했고, 미국 퀘이커들은 1780년경 노예를 해방했다. 요한 웨슬리의 노예해방운동 역시 퀘이커들과의 사상적 교감에서 이루어졌다. 


퀘이커들은 영성의 증언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시대를 극복하고 여성들에게도 증언의 기회를 보장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여성의 영성 증언이 가능한 설교가 최초로 허락되었다. 마침내 퀘이커 평등주의 사상은 현대 여성주의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선두 주자 모트(Lucratia Mott)를 낳았다. 


퀘이커들의 평화운동은 비폭력 평화사상을 공유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신실한 평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퀘이커들은 국가가 요구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적으로 인식하고 죽여야 하는 전투 행위를 신앙 양심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퀘이커들은 군복무 대신 전쟁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돌보는 평화 봉사에 매진했다. 군 복무에 대한 양심적 거부 행위는 오늘날 인권사상을 보편화한 대부분의 선진국이 수용하고 있다.


퀘이커들이 벌인 평화운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광범위하게 퍼졌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7년 노벨 평화상 위원회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 퀘이커 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와 영국 퀘이커 봉사회가 인류 평화를 위해 기여한 점을 높이 인정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여했다. 이후 퀘이커들은 기독교 전통 안에서 평화운동의 상징적인 종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종교의 두 얼굴> 중에서,  박충구 지음,  홍성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