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신영복

지금 여기서 이렇게 2016. 2. 1. 09:51

1.

마지막 선비가 죽었다. 스물일곱 해를 보통사람으로 살았고, 스무 해 스무 날을 귀양살이로, 다시 스물일곱 해를 글과 글씨와 그림으로 산 사람. 종이를 반으로 접은 양 잰 듯이 들어맞는 삶. 무력하다고 패배가 아님을 낮은 목소리로 일깨우곤 했던 무릎 휜 자들의 스승. 한 생애를 붓글씨 쓰듯 정갈하게 매무새 지어 먹물 묻지 않게 개어놓고 자리를 뜬 조선 마지막 유배 선비. 그가 떠났고 별의 동쪽 일대가 쓸쓸하게 비었다. 단 한 사람의 부재로 인간의 대지가 이토록 깊게 적요한 적은 없었다. 죽음마저 화선지에서 먹이 마르듯 하였다. 문득 길을 잃은 사람들은 그 말과 글씨와 그림 사이로 비틀거리면서 찾아와 침묵으로 울었다. 이것이 백성 민 민장이다. 저승길을 불러오기 위하여 스스로 열흘 곡기를 끊는 동안 그가 되뇐 세상 끝은 필시 처음을 돌아보는 일과 같았을 것이니. 처음처럼. 1월 열닷새 저녁, 이 땅에 희미하게 켜져 있던 그 찰의 등불이 꺼졌다. 신영복. 무기수 신영복.      

별의 동쪽, 신영복  중에서  /  소설가 서해성  /  한겨레신문 (2016. 1.  22)



2.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짧은 찰나라 하더라도 그것이 맺고 있는 중중(重重)의 인연을 깨닫게 되면 저마다 시공을 초월하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 꽃으로 가득 찬 세상은 얼마나 엄숙한 화엄의 세계인가. 지혜란 바로 그런 깨달음일 터이다.     《변방을 찾아서》 중에서, 신영복 지음 


3.

신영복 선생은 76세의 나이로 보면 결코 짧은 생애는 아니지만 20년의 옥살이와 10년의 부자유 상태를 빼면 너무 짧은 삶이었다. 
살아 있으면서 지옥과 대면했고, 중앙정보부에서 구타와 전기고문으로 기절 끝에 간신히 의식을 회복할 때에, 염라대왕과 같은 수사관이 자기 아들의 감기약을 주문하는, 인간성의 악마화를 지켜봐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인간의 선의를 믿었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었다. 

“날카로운 시대의 비수가 그의 삶을 조각낼 때에도 그는 시대를 기꺼이 심장에 품었다. 인간의 유한성과 불민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완전한 것들의 총화가 빚어내는 역동적 조화를 그는 가슴 벅차게 희구하였다.”


한국현대사에서 신영복 선생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강함과 부드러움, 텅빔과 꽉참, 경건과 소박, 명민과 우졸,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 엄숙성보다 친근, 속도보다 여백, 이념보다 관계 … 등으로 등치되는 개념들을 묶어내는 융합성과 조화력을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그를 지켜 본 학자의 말, 

“‘심지어 유치(幼稚)할 줄 아는 분’이라고. 이것은 내가 그를 묘사하는 최고의 찬사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생각을 다듬어온 사람이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을 보듬어온 사람이다. 그는 시대의 스승이고 고고한 선비임이 분명하지만 또한 우리 곁에서 아주 유치한 모습으로 함께 놀 줄 아는 사람이다.” 

신영복 선생은 어떤 글에서 “한 사람의 일생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일생에 들어가 있는 시대의 양()을 준거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살아온 ‘시대의 양’은 험난하였다. 민주공화제의 정부가 수립되고도 친일파들의 세상이고 4월혁명과 6월항쟁을 겪고도 그들과 그들의 후예는 군부독재자들과 함께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또한 이들의 중심에는 반시대적 허위의식으로 무장한 일군의 지식인ㆍ언론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정도를 버리고 독재ㆍ부패권력에 부역함으로써 우리의 지성사가 비틀어지고 역사가 비틀거렸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지식인들은 현대판 사문난적의 대상이 되고 감옥이나 사회적 몰락이 주어졌다. 신영복 선생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감금의 화석화’ 속에서도 정음(正音)을 지켰다. 비록 변방에서일망적 가느다란 그의 목소리는 울림이 있었고, 큰 떨림으로 나타났다. 명징한 언어와 잔잔한 미소는 변방인들의 마음을 곧고 시리게 만들었다. 


선생은 끝까지 ‘처음처럼’이었고 ‘더불어 숲’이었다. 그렇게 하여 자신과 이웃을 향해 모질게 내리치는 도벌꾼들의 도끼날에 향기를 묻히는 향나무가 되었다.

선생은 극랄한 조리틀림 속에서도 가장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가장 이성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40대의 얼굴을 70대에 이르기까지 간직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 깊고 맑고 넓은 심연이 자리잡았고, 여기서 항상 새로운 석간수를 쏟아냄으로써 노쇠하지도 녹슬지도 않았다. 온고지신의 학습이 스스로를 항상 일깨웠다. “눈물로 먹을 갈아 한숨으로 쓴 맘부림의 앙금이 바로 두보(杜甫)의 시다”란 말이 전하듯이, 신영복 선생이 남긴 글과 그림ㆍ글씨 역시 두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르다면 ‘앙금’ 대신 ‘양심’이 심연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한국사회의 낙후성에 대해 세 가지를 들었다. 불철저한 민주화,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 국제금융자본의 진입과 수탈이다. 이 같은 배경에는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과 노론으로 계속되는 지배세력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진단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비판에만 그치지 않는다.

세상의 지도에 유토피아라는 땅이 그려져 있지 않다면 지도를 들여다 볼 것없다는 시구가 나의 마음을 감싸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미완의 의미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천착해 갈 것인가 하는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미완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청년이며 새로운 시작이며 그러기에 과학입니다. 


김삼웅, 〈신영복 평전〉 23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