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다

망국의 징조

지금 여기서 이렇게 2019. 5. 15. 23:04

1896년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했다. 미국 국적을 가진 계몽주의자로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를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無知沒覺) 때문"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1935년) 이라고 했던 그였다.

대중은 왜 무지몰각했는가. 1884년. 서점 한 군데도 없고 정부가 펴내는 언문 책이라곤 삼강오륜 같은 유교 교리서만 있던 때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후 수신사들 보고서는 비단 장정본으로 만들어 곧바로 왕실 도서관으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아무도 개화를 읽을 수 없었고, 대중에게 개화는 악(惡)이었다.

일본에서는 개화파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1866) 초판이 15만 부가 팔렸고 '학문을 권함'(1872)은 해적판을 포함해 300만 부가 팔렸다.(마루야마 마사오 등, '번역과 일본의 근대') 모두 한문이 아닌 일본어였다. 대중이 개화를 알았기에 일본 근대화는 가능했다. 이제 조선도 혁명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1896년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만들었고, 무악재에 있던 청나라 사신 영접용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이를 위해 만든 단체가 독립협회였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서고 이듬해 3월 독립협회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어쩌면 그때가 조선에 마지막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백정까지 참가한 만민공동회는 연일 자발적으로 열렸다. 한글 신문과 토론을 통해 대중은 개화가 악이 아님을 깨달았다. 세상은 바야흐로 "몇 명의 박영효, 몇 명의 서재필이 있는지 모를 만큼(不知幾泳孝幾載弼)" 각성을 하고 있었다.(1898년 11월 23일 '고종실록') 가장 큰 주장은 의회인 중추원 설립과 자유 민권이었다.

1898년 10월 28일 일부 대신이 참가한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그런데 그날 '입헌군주정'이 튀어나온 것이다. 헌법으로 황권을 제한하자는 논의에 고종과 수구 세력이 즉각 행동했다. 군부대신 민병석과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자금 2000원을 들여 독립협회 파괴를 선동했고(1898년 12월 24일 '고종실록') 그해 12월 25일 독립협회는 폭력적으로 해산됐다. 만 3년이 못 되는 개혁의 기회는 사라졌다. 순식간에 세상은 '보부상 무리와 최악의 패거리가 구성한 반(反)개혁적 정부'가 장악했다.(1899년 1월 23일 '윤치호일기')

'박종인의 땅의 역사 : 망국의 징조와 탐욕' 중에서 , 조선일보 2019. 5.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