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우리나라의 <삼국사기>(1145년 편찬)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의 <일본서기>(720년 편찬)인데 여기에는 초대 왜왕(천황)인 진무(神武)서부터 제41대 지토(持統·여왕) 시대까지가 서술되어 있으며, 그 후 그 황통이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유지하면서 현재의 천황 아키히토에 이르기까지 125대가 계속되어 왔다는 것으로 일본사는 주장하고 있소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서부터가 사실(史實)인지가 분명치 않은 일본서기를 가지고는, 진짜 초대 왕이 누구였는지 특정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인 것이외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로 쓰다 소우키치(1873~1961)라는 사가가 있었소이다. 이분의 주장을 보면 서기의 서술 중에서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제15대 오진(應神) 이후부터이며, 그 이전의 서술은 모두가 신화라는 것이었소이다. 그렇다면 내가 앞서 글(92회)에서 말한 신공황후(제14대 왕의 왕비)의 사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삼한정벌’이라는 것은 허황된 신화가 아니겠소이까. 또 하나 저명한 역사학자를 소개하겠는데, 그분은 한때 ‘기마민족정복왕조’(驥馬民族征服王朝) 설을 주장했던 에가미 나미오 교수(도쿄대)로, 이분 역시 일본 왕실의 초대 왕은 ‘오진’이었으며,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온 오진은 말을 타고 싸움터를 달리던 기마민족이었다는 주장을 펼쳤소이다. 그런데 에가미 교수는 그 오진은 언제 어디서 건너온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말문을 닫고 오늘날까지도 확실한 말은 안 하고 있는 상태이외다. 다만 에가미 교수는 ‘4세기 말 다른 나라에서 온 망명객’, 그것이 오진이라는 것까지만 말하고 있지요. 일본 우익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는 소문도 들었소이다.
일본 각지에는 무인의 수호신인 하치만신(八幡神)을 모시는 하치만궁이 수천이나 흩어져 있는데 하치만신이라는 것은 오진(應神) 천황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것이 일본 황실의 종묘신이라는 것쯤은 전문적인 역사책이 아니더라도 예컨데 <고지엔>과 같이 널리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보통 사전에도 기재되어 있는 사실이외다.
그런데 이 많은 하치만궁의 총본산이 어디냐 하면 그것은 규슈지방 오이타현에 있는 우사(宇佐) 하치만궁인 것이외다. 이 사실로 보아 초대왕 오진이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고장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것이 우사였다는 것은 짐작이 되나, 문제는 그것이 언제였나가 아니겠소이까. 이제 우리나라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로 주목을 돌려야겠는데, 제15대 침류왕이 어린 태자를 남기고 죽자(기원후 385), 그 아우가 ‘태자는 연소하다’는 이유로 조카를 제치고 자기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것이 제16대 진사왕이었으니 그는 즉 왕위를 훔친 찬탈자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진사왕 8년(392) 7월, 고구려왕 담덕(호태왕)이 4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로 쳐들어와 여러 성읍을 빼앗은 다음,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요충인 관미성을 함락시켰소이다. 관미성은 예성강 연안에 있는 현재의 조읍포인데, 이곳은 고구려와의 국경을 지키는 중요한 군항이었던 것이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사왕은 관미성을 회복할 생각은 안 하고 구원에서 열흘 동안이나 사냥을 즐기고 있던 중, 11월에 무슨 이유인지 구원 행궁에서 죽었으므로 진사왕의 조카, 즉 침류왕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방왕이 되었소이다.(392) 여기까지는 삼국사기의 기술인데, 놀라운 것은 진사가 죽고 아방이 왕위에 오르는 이 장면에 난데없이 <일본서기>의 오진 천황이 등장하여 삼국사기보다도 더 자세하게 진사왕이 죽은 이유까지를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외다.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소이다. ‘오진 3년(392) 11월, 일본의 오진왕은 진사왕의 행태에 분개한 나머지 가신들을 백제로 파견하였는바, 가신들은 진사왕의 시해를 요구하여 죽이게 한 다음, 아화를 세워 다음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진 3년인 동시에 진사왕 8년인 392년, 오진 천황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오이다. 관미성의 함락이 10월, 구원에서 열흘 동안 진사왕이 사냥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것이 11월, 이 소문이 오진에게 전달되어 분격한 나머지 백제의 수도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가신들을 파견하여 구원 행궁에 있는 진사왕의 시해를 요구하고 다음 왕으로 아방왕을 옹립한 것이 역시 11월. 만일에 392년(오진 3년)의 시점에서 오진 천황이 일본의 도읍지, 예를 들어 현재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내(畿內)에 있었다고 한다면, 이상과 같은 일이 가능했겠소이까.
한성에서 나라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백제로부터 소문이 전달되고, 이에 따라 파견된 가신들이 한성에 도착하기까지는 적어도 석달의 시간이 걸렸을 것 아니오이까. 따라서 일본서기가 말하는 오진 천황은 392년 시점에서는 곰나루(웅진·현재의 공주)에서 왕으로 있던 인물이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믿는 바외다.
백제에 대한 호태왕의 공격은 여전히 계속되어 호태왕(광개토왕)비의 기술을 보면 병인년 즉 396년,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백잔국’(百殘國)과 ‘이잔국’(利殘國)을 공격하였소이다. 먼저 공격을 받은 백잔국의 아방왕은 생구(즉 노예)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면서 항복하였으므로, 호태왕은 다시 남쪽의 이잔국을 공격하여 ‘잔주’ 즉 국왕의 아우와 더불어 조신 10명을 포로로 잡아가지고 환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잔주’ 즉 이잔국 왕의 아우를 포로로 잡았다고 하면서 ‘잔주’ 자체의 행방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외다.
이잔국이 멸망한 396년은 ‘아방왕 5년’이고 ‘오진 천황 7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일본서기의 오진 7년 항을 보면 이해 9월 고려인·백제인·신라인 등 대량의 이민들이 조선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외다. 호태왕 비가 행방이 분명치 않은 듯이 적어 놓은, 이잔국의 국왕(일본서기가 말하는 오진)이 일본으로 도피한 396년이 일본 황실이 시작되는 해인 것이외다. 호태왕 비가 말하는 이잔국은 주몽의 아들 형제 온조와 비류 중 형인 비류가 세운 또 하나의 백제였던 것이외다.
정경모 재일 통일운동가/한겨레신문 (2009.11.16)
2.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은 “간무(桓武·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것이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다”며 한국과의 혈연을 인정했습니다. 사실은 간무 천황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 고닌(光仁) 천황도 백제 성왕의 손자였습니다.
간무 천황은 혼란했던 일본을 강력한 통치력으로 안정시키고, 훌륭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도읍을 헤이안(平安·교토)으로 옮기고, 신사를 지어 백제 성왕·비류왕·초고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헤이안 천도 1100주년이던 1895년 일본은 간무 천황을 일본 문화의 국조신으로 모시기 위해 헤이안신궁(平安神宮)을 세웠습니다. 일본에서 제일 큰 도리이(鳥居:신사나 신성한 곳의 입구에 세우는 일종의 문)를 세우고, 외배전 좌우 행랑 끝에 아름다운 다층 누각을 붙였습니다. 신궁을 둘러싼 정원은 그 규모가 엄청납니다. 남신원에서 시작해 서신원·중신원을 거쳐 동신원에서 끝나는 정원에는 일본 정원의 진수가 몽땅 담겨 있습니다. 남신원은 봄 벚꽃으로 알아주고, 서신원은 꽃창포를, 중신원은 가을 단풍과 멋진 징검다리의 어울림을, 동신원에는 태평각의 설경을 절경으로 손꼽습니다.
동신원 큰 연못을 가로지르는 태평각은 헤이안신궁의 백미입니다. 동심원 큰 연못에 장주석을 세우고, 그 위에 지은 좌우 긴 익랑이 딸린 정자형 다리입니다. 중심 건물 지붕 위에는 봉황이 나래를 펴고 막 날아오르려 합니다. 목조 건축의 천국이라는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명작입니다.
김영택 화백/중앙일보 (200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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