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신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신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양성론'이라고 합니다.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모두 가지되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칼케돈공의회(451년)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에는 신성만이 존재한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단성론'입니다. 인성은 신성에 섞였다는 입장입니다. 콥트교회 등을 제외하면 모두가 양성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셨던 기간과 그 공생애를 끝낸 이후가 아주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예수님이 갓난아기였을 때의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만, 예수님은 그 기간을 거쳤습니다. 다른 아기와 같이 어머니인 마리아의 젖을 먹었고 대소변을 구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럴 때에 신이라는 면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양성론에 의하면 그때에도 신성은 여전하였을 터인데, 그 신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장과 관련하여서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각에 있어서의 성장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식이 성숙하여짐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변화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신이라는 면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신이라면 의식에 있어서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변화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초반에 광야에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시험은 첫 창조 때의 아담에게 주어진 마귀의 시험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담은 최고의 조건에서 있었던 시험에서 넘어졌고 예수님은 최악의 상황에서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예수님인 신인이었다면 대조 자체가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아담은 사람이었을 뿐이기에 넘어졌고 예수님은 신인이기에 넘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삶의 모든 부분은 신자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은 신인이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인이기에 밤이 새도록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신인이기에 모든 유혹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신인이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자들은 단순한 인간일 뿐이기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이 땅에서의 예수님에 대해 신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셨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유일하게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다만 성령께 철저하게 복종하셨고 성령께로부터 주어지는 권능을 소유하셨으면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이라는 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신이라는 면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먼저 출발에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과 다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는데, 자기를 비우심으로 사람으로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출생에 있어서도 독특하였습니다. 마리아라는 여인의 몸을 통하여 출생하게 되는데,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이를 동정녀 탄생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동정녀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할 때에 동정녀였던 마리아를 강조하는 모습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마리아는 이 땅에 존재하게 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어머니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주장이 가능하였던 한 배경으로 예수님은 신인으로 말하는 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있어서도 다른 모든 사람과 다릅니다.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로마에 반역하는 사람으로 몰려서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에 반역하는 반역자들을 죽이는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스스로를 비어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은 부활로 높아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되찾은 주님으로 높아지신 것입니다.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나기 이전의 독생자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이 확증된 것입니다(롬 1:4).
물론 신이라고 이야기될 수 여지가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성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 때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표현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에 말한 것으로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구속 역사를 성취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신 분이라는 의식에 의해서 이야기되었던 바라는 것입니다. 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선언하는 것으로 보아도 문제가 되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을 신인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꼭 그렇게 규정하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아닌 신인으로 보는 것은 성경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문제를 야기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있었던 순종을 약화시킬 뿐입니다. 한 사람이 아닌 신인이기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한 사람이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참 사람이셨습니다. 온전한 사람이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참 사람, 온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와 신자들에게 나아가 비신자들에게도 본이 되십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온전한 안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셨던 예수님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한 사람이었기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의의를 가집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곧 전 삶에 대한 바른 이해는 중요합니다. 바른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정당한 역사적 예수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한정된 자료를 바르게 이해한 결과로서 역사적 예수는 중요합니다.
N. T. Wright는 그의 책들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와 <Jesus 코드>에서 제시한 내용은 매우 유익합니다. 그는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말하며 그 사역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새 시대를 여시는 분, 새 시대의 새 백성을 부르시는 분, 옛 백성들을 떠나가신 하나님을 돌아오시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이지만, 설명들은 성경 본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잘못된 종말론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내용들도 유익합니다. 추리 소설을 쓰는 것과 같은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 정당한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땅에서의 예수님을 신인으로 보지 않고 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교회 역사에서 결정되고 고백된 내용이 지속적으로 전승되었다고 해서 오늘날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과연 그러한가?"라는 태도로 재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신이이라는 입장은 사도들로부터 교회에게 가르쳐지고 전승된 고백이 아닙니다. 후대의 교회에 의해서 결정된 고백입니다. 그 당대에 그 고백은 최상의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도 그대로 답습하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셨던 기간 동안의 예수님에 대해 성경은 신이라고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한 사람이되 성령께 온전히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순종하셨던 분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구속 역사의 성취를 향하여 나아갔던 삶의 걸음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오늘날의 교회에게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닮아야 할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알아야 제대로 닮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말하지만 예수는 없다고 비판을 받는 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일차적인 사안이라고 하겠습니다.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본받아서 살아감으로 그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박창진 기자/뉴스앤조이 (200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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