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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철학

퀘이커

1. 세계2차 대전 때 수천 명이 참전을 거부했다

 

세계2차 대전 때 미국에서 이미 수천 명이 참전을 거부했다. 바로 퀘이커 교도다. 하지만 미국은 이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 사회 봉사에 처했다. 이미 70년 전에 미국은 이렇게 했다.  한국은 아직 안 된다. 병역 거부하면 바로 감옥행이다. 우리 사회가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런 차이를 주장하는 게 매우 큰 모험, 두려움이다. 모이면 힘이 세진다. 1명이 옳은 말을 한다고 하자. 이 사람을 팰 수 있다. 10명이면 함부로 못 건드린다. 100명이나 1,000명이 되면? 10,000명으로 늘어나면 법이 바뀐다. 당당하게 자기 주장하자.” 

김동춘 교수. 성공회대,  《대한민국 잔혹사》출간 기념강연회에서 - 국가 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2. 노예 천문학자 벤자민 배네커
 
벤자민 배네커는 다재다능했다. 그는 농부이면서 천문학자였고 측량가이면서 수학자였으며 스스로 익힌 지식을 연감으로 기록했다. 1731년 오늘 태어난 그는 신분이 노예였다. 혹자는 그를 고용계약에 따라 식민지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인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본인은 항상 아프리카 흑인의 후예라고 주장했다. 10대 초반 때 그를 고용한 백인 퀘이커교도와 친구가 되면서 농장주의 개인서재를 공유, 독학으로 타고난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다. 그 중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뛰어났다. 22살 때 회중시계를 모델로 만든 나무시계는 그가 죽어서도 고장 없이 작동할 정도로 재주도 탁월했다. 1788년 그는 탐사팀에 합류해 천문학적 지식을 이용, 포토맥강 일대 약 260㎢ 지형을 측정했다. 몇 년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정미소에서 일하며 천문력을 작성해 일식과 월식, 달과 별, 행성의 움직임을 계산해 냈다. 또 이런 정보를 연감을 통해 기록해 나중에 워싱턴 D.C.를 계획하는 데 일조했고 연감을 출간할 때 토머스 제퍼슨에게 편지를 써 노예제도와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그는 노예이면서 미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술을 벗 삼아 통나무집에 살다가 1806년 사망했다.    우문기 기자 / 매일신문 (2010. 11. 9)

 

3. 링컨보다도 앞서 노예를 해방시킨 존 울만

 

국 식민지 시절 미국의 퀘이커 교도였던 존 울만은 링컨보다도 앞서 노예를 해방시킨 주인공이다. 노예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그때, 울만은 그것이 인간의 평등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어긋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한 퀘이커 공동체 교우들을 20년간 성심으로 설득했다. 울만의 노력은 보답받았다. 퀘이커교는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80년 전에 노예를 해방시켰다

 

4. 정직했던 교회개혁자 조지 폭스

 

퀘이커 교회의 설립자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토퍼 폭스(Christopher Fox)와 어머니 메리 레이고(Mary Lago)는 매우 교양있고 정직한 크리스천이었다. 폭스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고 정직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다.

위와 같은 좋은 성품 때문에 부모들은 그에게 권위있는 사제(priest)가 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부모의 권고와는 다르게 정직하고 성실한 양털장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물건을 속여 팔던 사회적 혼돈의 시대에 정직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정직은 당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검은 돈을 챙기지 못하는 정직한 폭스가 그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이다.

1644년 폭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일류대학에서 공부했다고 참된 그리스도 일꾼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계신다”는 제대로 된 신학을 선포하며 혼미한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164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지역까지 맨손으로 돌아다니면서 가슴에 지닌 참 진리를 담대하게 전했다. 국가 전복을 위한 반란을 주도한다는 이유로 한때 권력자들에게 오해를 받아 국가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위의 수많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폭스는 올바른 사회를 세우기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다. 어려움 중에 그의 영혼은 무게와 깊이가 더해졌고, 말과 행실도 매우 진지해져 갔다.

폭스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접하며 사회의 약자(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성경적 기독교라고 가르쳤다. 당시 사회악(惡)인 노예들을 학대하지 말고 늘 사랑으로 대하라고 성도들에게 권고했다. 노예들에게도 주인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하고 정직할 것을 동시에 충고했다. 위와 같은 그의 견해는 후배들에게 계승 발전돼, 미국 퀘이커 교도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주도하는 시발점이 됐다.

폭스는 사람을 차별하는 뜻에서 낮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던 당시의 호칭 ‘You’를 사용하지 말도록 권고, 대신 모든 사람들을 같이 높이는 Thou(그대), Thee를 사용하도록 권면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모자를 벗어야 된다는 악습도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62년 영국에서는 이러한 사회 평등운동에 가담한 퀘이커 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률안이 통과됐다. 의회가 높은 신분인 국왕에게 맹세를 거부하거나 맹세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행위는 불법이며, 하나님의 말씀과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 평등운동을 주도했던 폭스는 체포됐고, 재판관들은 잉글랜드 국왕의 주권과 그에 대한 충성을 입으로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폭스는 평생 한번도 사람에게 맹세를 한 적이 없으며 사람들과 약속이나 계약을 맺은 일도 없다면서 국왕에 대한 맹세 선언을 거부했다. 결국 폭스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죄로 다른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과 함께 강제 투옥됐다.

성경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주도한 폭스 때문에 영국 의회는 1664년에 국교 모임을 제외하고 다섯 사람 이상 모이는 종교 집회를 모두 금했고, 국왕에 대한 복종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조건 형사 처벌한다는 비밀집회법(Conventicle Act)을 통과시켰다. 폭스를 포함한 수많은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이 법에 따라 또다시 투옥됐고, 가장을 잃은 식구들은 엄청난 경제·사회적 고난을 받았다. 폭스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장이 없는 가정을 돕기 위한 월회(monthly meeting)를 조직했다.

장기간의 전도여행과 수차례 투옥으로 노년에 이른 폭스의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한때는 눈과 귀가 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민들에게 전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형제 국가인 아메리카로 건너가 여러 섬들을 돌면서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을 확보했고, 국가로부터 억압당하는 그들을 복음으로 격려하며 진리만을 힘있게 전했다. 소외된 토착 주민들(인디언)을 찾아 평등을 강조하는 순수 복음집회를 열기도 했다. 추장을 비롯한 부족의 의회원 및 수많은 주민들이 참여, 폭스가 전하는 신실한 복음에 공감하고 크리스천이 되기도 했다. 폭스는 매우 담대하고 솔직했으며, 독창적이었고 그의 영혼은 항상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해 늘 충직했다.

17세기 정치적 혼란을 틈타 물건을 속여 팔고 부당하게 재판하던 속임의 시대를 역류해 퀘이커 교파를 세우고 진실한 삶을 강조하며 인생을 펼쳤던 그는 진정한 복음적 사회개혁자였다. 폭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늘 가슴에 지니고 살았으며, 성경 진리만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일에 철저하게 헌신했다. 사람들의 오해를 무릅쓰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복음만을 전했고, 전도를 위해서는 피곤하고 위험한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대적 진리의 종이었다.

특히 그는 성경에 있는 참된 예배로의 개혁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만연했던 모양뿐인 허상의 예배를 철저히 거절하고, 내용 있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불평등한 당시 사회의 관습과 수직 구조를 신앙의 빛 아래 개혁하려고 힘을 다한 진정한 사회 개혁가요, 신실한 크리스천 지도자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향한 개혁의 바람은 계속 불어야 한다. 성경에 벗어난 무분별한 진리의 외침은 즉각 교체해야 하고, 거짓과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사회의 정책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국회청문회를 통해 드러나는 장관 후보자들의 위장전입·탈세·자녀 병역기피 문제 등은 오늘날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사회는 지금 고위층을 중심으로 불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고, 그것들을 부추기는 악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법을 제대로 지키면 칭찬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을 당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이런 때 조지 폭스 같은 하나님 중심의 진실한 지도자가 출현해 목을 내놓고 정직을 외치는 복음 운동, 사회 개혁운동을 주도해야 한다. 정직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교회와 사회를 성경대로 개혁해 나갈 때 우리 교회와 사회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송태흔 목사의 <시사교회사>

 

5.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분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퀘이커교는 개신교 신앙에 속합니다. 서구 경우에 각 퀘이커교도는 대체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믿는 편입니다. 현재 영국 퀘이커회는 세계교회연합회와 영국교회연합회의 회원입니다. 영국교회연합회는 ‘삼위일체론’에 반대하는 유니테리언회는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 삼위일체론에 대한 입장 밝히기를 꺼려하는 퀘이커회는 기꺼이 회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94년을 기준으로 세계에는 약 303,858명의 퀘이커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미국 103,379명)에 약 155,000명, 아프리카 대륙(케냐 104,500명)에 약 122,000명, 유럽(영국 17,934명)에 약 20,500명, 아시아 대륙(한국 20여 명)에 약 4,592명, 오세아니아에 약 1,766명 정도가 있습니다.

 

 

평등사상의 강조로 인해 목회자 지도 없이 혼자서 성경공부나 기타 연구를 해야 하는 현대 퀘이커는 다수를 위한 종교보다는 소수 엘리트 종파로 변화하고 있는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양적성장과 질적향상의 문제는 앞으로도 퀘이커들이 계속 고민해야 할 주제 중의 하나라고 판단됩니다. 한국퀘이커는 1958년 처음 예배모임을 가진 이래 반세기가 넘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회원이 약 20여 명에 불과하고 아직 한국교회연합회의 회원이 아닙니다. 아울러 아직 한국사회와 종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퀘이커교는 영국이 청교도혁명(1640~1660)에 휩싸여 있었을 때 서서히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의 사상은 영국에서 종교친우회(즉 퀘이커교) 창설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폭스는 영국에서 직공(weaver)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엄격하고 철저한 청교도적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매우 종교적이었습니다. 그의《일지》는 1694년 처음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이 책이 퀘이커주의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일지》를 통해서 폭스는 각 개인은 하나님과 직접 교감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 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내면의 빛(inner light, inspiration 혹은 holy spirit), 내적 그리스도, 하나님의 씨앗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나님의 영성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퀘이커들은《성경》을 존재하게 한 절대자의 성령이 지금도 계속해서 인간 속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절대자가 몇 세기 전에 보여준《성경》의 기록보다는 ‘지금 여기서’ 절대자가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 내면의 빛(성령)이《성경》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간주되었고, 그래서 집권세력으로부터 퀘이커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런 외부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이 교회 권위를 강조하고, 개신교가 성경의 권위를 중요시한 반면, 퀘이커는 성령의 권위를 역설합니다. 이 내면의 빛의 신앙은《신약성경》〈요한복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참 빛은 이 세상에 오는 모든 인간에게 빛을 준다.” “나(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자는 누구나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박사 (2013. 6. 9)

 

6. 영국 퀘이커 신앙과 실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다양성과 차이를 서로 존중합시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편견을 갖지 않도록 자제 합시다.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기르려고 노력합니까? 우리 각자는 독특하고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합시다.  

                                                                                                                       (영국 퀘이커 신앙과 실천 22) 

퀘이커는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항상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타인의 경험과 의견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의 가치와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타인에게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과 의문도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이끌어 주고 우리 모두 속에 있는 빛을 더욱 크게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퀘이커 평화

 

평화는 우리안에서 시작합니다. 평화는 우리가 속한 가족, 모임, 우리의 일과 휴식, 우리가 사는 지역 그리고 마침내 전세계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세계평화를 이룰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평화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라기 보다는 매순간 추구해야 할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요? 시드니 베일리 1993     (영국 퀘이커 신앙과 실천 24.57) 중에서

 

7.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2001년엔 샤를리 테러보다 더한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9·11테러가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무슬림들을 다 때려죽일 듯 증오감에 치를 떨 때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한 이들이 있었다. 기독교 종파 미국퀘이커봉사위원회였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초청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물었다.

 

이제 샤를리도 무슬림들도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리고 우리가 핍박하거나 그에 동조함으로써 상처 입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한다. 강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약자들의 예언자를 조롱하는 것만이 아니다. 관용과 포용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 조현의 휴심정, '총과 펜보다 강한 것' 중에서 (2015. 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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