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 만하지는 않았다.
그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2001년 봄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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