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에 다녀왔다. 비록 당일 하루 관광이지만, 나에게는 개성 명승지를 관광한다는 것보다는 북녘 땅을 밟아 보고 북한 주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대치하던 때 군대를 다녀와서 개인적으로는 약간의 긴장감과 더불어 휴전선을 통과한다는 데 대한 설레움이 있었다.
그러나 남쪽의 관광객 대부분은 지난 10년간 남북 화해정책에 익숙해져 있어서 인지, 금강산 관광을 통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북녘 땅을 다녀와서 인지 비무장지대를 통과하는데도 모두 무덤덤해하였다.
자욱한 안개로 어디쯤 가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되었는데 갑자기 북한군 짚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 차안에서 북한군 장교들이 남쪽 차량이 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 ! 내가 휴전선을 통과해서 북녘 땅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감회가 새로웠다.
군 복무 시절 남쪽에 침투한 무장간첩을 추적하며 한 달 동안 산을 타며 작전을 한 경험이 있어 북한군 하면 전투적이고 강하다는 인상이 남아 있는데, 이제 나이 들어 북한군 병사들을 직접 가까이서 보니 이제 20을 갓 넘은 청년들이 앳되어 보였다. 우리의 젊은이와 하나도 다름이 없어 보인다.
북쪽의 산하는 남쪽과 너무도 차이가 났다.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지나 박연폭포까지 1시간을 달리는 동안 창밖의 산을 보니 나무가 하나도 없었다. 산 정상에도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군사적 목적으로 베어낸 것인지 아니면 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베어낸 것인지 모르겠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삭막한 산의 모습이 오늘날 북쪽의 어려운 상황을 그대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개성 시내는 60년대에서 시간이 멈추어 버린듯 낙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주민들의 옷차림은 말쑥했고 시간에 쫓기지 않는듯 천천히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니는 모습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남쪽 차량에 동승한 북측 안내원들은 반갑게 인사하며 "어디서 왔느냐, 무슨 일을 하느냐"며 말을 걸어 왔다. 관광지에서도 우리 남쪽 사람들과 담배도 나누어 피우며 담소를 하며 격의없이 지냈다. 학교 앞을 지날 때에는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일반 주민들은 사전에 교육을 잘 받은 듯 남쪽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도로에 나와 있으면, 길을 건너 다른 길을 이용하였으며 접근하지 않앗다. 남쪽 차량이나 사람들을 특별히 주시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평범하게 행동하였다. 남쪽이나 북쪽이나 이제 서로 오고가고 마주치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식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남북 간 화해 교류정책의 결과로 남북 모두 사람들의 사고도 많이 변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1. 박연폭포
박연폭의 높이는 37m, 폭포의 폭은 수량이 많을 때 7m라 한다.
개성에서는 북쪽으로 18km정도 더 가는데, 주변 바위에는 옛날 이곳을 유람한 명문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황진이, 서화담 등 선비들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을 것이리라...
2. 북한의 여성들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들, 곱게 화장을 하였다.
남자 1 : "남쪽 아가씨들이 더 예쁜 것 같은데..."
남자 2 : "원래 남쪽이나 북쪽이나 미인 비율은 비슷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남쪽 여성들 중에는 성형수술을 한 사람들이 많다고 보아야겠지 "
3.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
박연폭포 주변 바위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수 백년 전 이곳에 유람 온 선비들이 기념으로 새겨 놓은 것 같다.
뜻밖에 그곳에서 성은 다르지만 나와 같은 이름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평소 내가 쓰는 서체와 너무도 흡사하였다.
글을 새긴 사람이 당나라 '구양순'의 서법을 배운 듯 하다.
4. 관음사
관음사는 970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절로서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북쪽의 문화재는 대부분
단청을 새로하지 않고 옛것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남께 3배를 하고 나오는데 머리 기른 스님이 "성불하십시오" 하며 합장을
하였다.
관음사 약수터, 어릴 때 보았던 바가지를 보니 정겨웠다. 물맛도 좋았다.
이 약수 한 바가지로 나의 마음이 맑아지기를 다짐해 본다.
5. 령통식당
개성의 유명한 13첩 반상 정식
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재료로 조리를 하였는데 화려하지 않고 맛이 담백했다. 밥그릇이 남쪽 보다
더 커서 인지 밥을 남긴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평소의 식습관 대로 밥, 국, 반찬을 모두 깨끗이 비웠다.
이 좋은 음식을 그냥 먹을 것인가. 북쪽 소주를 한 병 사서 마셨다. 한 병에 1달러
남쪽의 술꾼들 왈 남쪽에서는 식당에서 술을 마시면 시중에서 사는 가격의 3배를 받는데, 북쪽은 같은
가격을 받는다며 아직까지 북쪽이 '자본의 물'이 들지않았다고 치켜세운다.
6. 숭악서원
고려시대의 충신 정몽주가 태어난 곳으로 나중에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조선의 건국을 끝까지 반대하여 살해한 인물을 후대의 조선 임금들이 그의 충절을 높히 평가하고 기렸
다는다는 사실을 새로 알았다. 조선 중기이후 왕권이 약해지자 신하들에게 정몽주의 충절을 강조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정몽주 영정
7. 선죽교
선죽교 돌다리 위의 붉은 자국
비가 오면 더 선명하다고 하는데, 정몽주의 피자국이라고 한다.
8. 고려박물관
고려시대 성균관으로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 한다.
지금은 고려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문화재의 보존이 엄격하지 않다. 개성 시내에 있는
남대문도 별도의 철책없이 그대로 개방되어 있다. 마치 50년대 우리나라 남대문 처럼..
마당에 있는 거목들은 모두 1000년이 넘었다 하니, 당초 이곳 성균관을 만들 � 심은 것 같다.
역사의 풍파를 모두 지켜 보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공민왕릉을 설명하는 안내원 적조사 쇠부처
현화사 7층탑 흥국사 탑
기념품 판매점 북쪽에서 만든 화장품
9. 임진강
이제 다시 남쪽으로 돌아왔다. 임진강은 아무 말없이 그대로 흐르고 있다.
'소요유(逍遙遊)'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쿄 여행 (0) | 2010.09.22 |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0) | 2010.01.28 |
일본에서 먹은 음식들 (0) | 2009.10.10 |
위스콘신주립대학 홈페이지 (0) | 2008.04.05 |
위스콘신 (0) | 2008.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