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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1. 엉뚱한 기도

 

이제 기도는 어떻게 보면 목사님의 전유물이나 교회에서 행하는 형식적 예배의 일부분에 불과한 무엇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기도가 실제 사용되는 경우를 예를 들면, 목사님이 어느 집을 심방할 때 선물 대신 '같이 기도하자'는 것을 안고 가는데, 이 경우 기도는 목사님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선물이다. 교인이 어려운 고민거리나 문제로 찾아오면 또 손을 잡고 '같이 기도하자'고 한다. 어려움을 다 해결해주는 도깨비 방망이다.

 

말 안 듣는 교인 있으면 찾아가서 '형제여, 어제 밤새도록 그대를 위하여 하느님께 눈물로 기도했소이다' 하고 그 형제의 마음을 녹이는 위무 기도, 또 교회에서 '하느님, 지금 저희에게 교회 건물이 필요한 것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 이 일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하는 권장 기도, 설교 도중에 빠뜨린 것을 덧붙이는 보충 기도, '하느님, 지금 이 장로님이 여행 중이십니다. 그와 함께 하여 주시고' 하는 광고 기도, '하느님, 김 집사님이 새 집 사시고 감사 헌금 냈습니다' 하며 헌금 봉투 낸 분들 명단을 읽어 주는 표창 기도, 기도 중 마음에 안드는 교우를 위협하는 협박 기도, 복수 기도 등등 엉뚱한 방면에서 기도가 이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일종의 용도 변경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이겠는가? 우리만 하느님을 향해 말하고 조르고 강요하고 옆구리를 찌르고 팔을 비틀며 하는 기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하시는 은밀한 음성을 가만히 들으려 하거나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노력이 전혀 없는 이런 일방 통행적 기도가 참된 기도이겠는가?

 

2.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내 죄를 위해 피 흘리심으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지금 진정으로 의미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큰 믿음의 은사다. 이런 믿음을 통해 삶이 바뀌고 삶의 의미와 기쁨과 보람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한 사실은 이제 이런 교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의미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는 신학자 큉도 지적했듯이 로마시대의 형법 사상을 기초로 성립된 이런 특수 해석을 믿고 안 믿고가 기독교 핵심 문제도 아닐뿐더러, 성경의 기본 메시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교리,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동시에 겸유하셨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양성론(兩性論)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4세기 이후 8세기까지의 교회 공의회에서 제정 공포된 이같은 고전적 기독론은 그 당시 서양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세계관이었던 그리스 철학의 도움으로 형성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을 교리사를 올바로 읽은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런 교리는 신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본래적 메시지를 그리스적으로 번역한 '빈약한 번역'에 불과하다.

 

3.

독일 철학자 칸트는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불행해지고 선한 행위를 한 사람은 행복해지는 상태가 '지고선' 상태다. 그러나 현세에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너무나 억울하고 또 그런 사회에서는 윤리고 뭐고 성립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요청적으로' 내세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세에는 모든 잘잘못을 가름해줄 전능자, 전지자로서의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믿어야 한다며 이것을 윤리학, 종교 철학의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중에서, 오강남 지음, 현암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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