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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존재

침팬지도 '감정이입' 하고 자폐증까지 앓는다

영장류는 감정이입 가능한 '거울뉴런' 신경세포 갖춰, 

집단 유대감 높은 침팬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겪어

 

공상과학(SF) 영화는 과학지식을 빌려 상상력을 펼치지만, 가끔은 영화가 거꾸로 과학에 영향을 주는 일도 있다. 지난해 여름 개봉돼 대성공을 거둔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도 그런 예이다.

영화는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투여받은 실험실의 침팬지가 인간에 맞먹는 지능을 갖게 되고, 실험실과 동물원에서 학대받는 동료들을 규합해 탈출시킨다는 내용이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1968년 작 '혹성탈출'에 나오는,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지구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그린 것이다. 영화는 치료제로 한몫 챙기려는 인간의 탐욕이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를 얼마나 학대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 영화가 나온 지 4개월이 지난 지난달 미국 국립보건원(NIH)은 생물학과 의학 연구에서 침팬지를 실험동물로 쓰는 것을 사실상 중단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제 침팬지를 실험에 쓰기로 한 연구과제들은 대부분 미국 정부 연구비를 받지 못하게 됐다. NIH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은 영화가 침팬지 실험에 대한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했다고 본다. 영화 '도가니'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아동 성폭력에 경종(警鐘)을 울린 것과 비슷한 경우다.

물론 과학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동물실험에 아주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영화에서처럼 무자비한 실험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침팬지나 원숭이 실험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1960년대 임신부의 입덧을 막는 신경안정제로 개발된 탈리도마이드는 쥐와 개를 이용한 독성실험에선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신부 5000여명이 기형아를 낳았다. 한 생물학자는 "인간과 유전자가 99% 같은 침팬지나 원숭이 등 영장류로 실험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참극"이라며 "영장류 실험은 다른 대안이 없을 때만 아주 제한적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이 영장류 실험 금지를 대세로 인정하는 것은 실험실의 침팬지와 원숭이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알츠하이머 치료제 덕분에 유인원들의 지능이 높아지고 감정마저 인간과 닮게 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지금도 유인원들은 인간과 흡사한 감정을 갖고 있다. TV 드라마 '다모(茶母)'의 명대사인 "아프냐, 나도 아프다"를 낳은 바로 '감정이입(empathy)'이다.

감정이입은 뇌에 뿌리를 두고 있다. 22년 전 이탈리아 연구진은 원숭이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데도 다른 동료나 사람의 행동을 보고 뇌에서 그들과 똑같은 신경세포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진은 이 신경세포를 '거울 뉴런(mirror neuron)'이라고 이름붙였다. 이후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 모두가 거울 뉴런을 갖고 있어 동료의 고통을 제 것인 양 느끼는 감정이입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품이 전염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하품하면 따라서 하는 경향이 강하다. 침팬지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미 에모리대 여키즈 국립영장류연구소는 23마리의 침팬지를 두 그룹으로 나눠 키운 다음, 다른 침팬지가 하품하는 영상을 5초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다른 그룹의 침팬지보다 함께 자란 침팬지가 하품하는 모습을 봤을 때 하품을 따라 하는 경우가 50%나 더 많았다.

하품을 하는 이유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영장류가 천적(天敵)에 대항하기 위해 뇌의 경각심을 높이는 데서 시작돼 집단의 유대감을 높이는 기능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하품까지 함께 나누던 동료 침팬지들이 하나 둘 주사를 맞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얼마나 큰 고통을 느끼겠는가. 실제로 지난해엔 실험에 사용된 침팬지들이 고문이나 재난을 겪은 사람처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실험실 생활을 오래한 침팬지가 자폐증 증상을 보였다는 얘기도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때 인간답다. 그래야 친구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괴롭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해할 대상에 침팬지와 원숭이도 넣어야 할 때다. 또 그 대상이 산의 풀과 나무로까지 확대될 때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사족(蛇足) 하나. 영화 제목에서 '혹성(惑星)'은 중심 별 주위를 도는 행성(行星·planet)의 일본식 표현이다. 일본에서 "혹시 별이지 아닐까"라는 의미에서 만든 말이다. 영화 원제를 직역하면 '유인원 행성의 기원(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이다.

 

이영완 기자/조선일보 (20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