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반도의 38선 분단 결정
1945년 대일본 전승기념일을 앞둔 어느 날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은 참모들을 불러 한국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을 얻어낼 작전 게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또 마셜 장군은 에이브 링컨(Ave Lincoln) 장군에게 태평양전쟁 이후 한반도를 어느 곳에서 분할할 것인지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나의 상관이자 최고 전쟁 기획자였던 링컨은 전략기획단을 회의실로 소집해 전략회의를 열었다.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대령이 가장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평양 바로 남쪽,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해야 한다고 말했다. 39도선은 한반도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다. 그는 폭이 좁으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군사로도 방어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를 듣고 있던 링컨은 "아니야!"라고 말했다. 이어 지도 위에 38도선을 따라 그었다.
"선은 바로 이곳에 그어야 돼."
우리 모두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앤디 굿패스터(Andy Goodpaster) 대령이 링컨에게 질문했다.
"39도선이 가장 적당한 해결책인데, 왜 1도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까?"
링컨이 답했다.
"니콜라스 스파이크만(Nicholas Spykman) 떄문이지.
니콜라스 스파이크만(1893~1943)은 예일대 지리학과 교수로 미국 최고의 지정학자였다. 그는 1944년 <평화의 지리학>이라는 책을 통해 '지리는 영구적이기 때문에 해외정책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고 주장했다. 또 자신의 수업에서 세계 최고의 문학과 발명품 중 90%가 38도선 북쪽에서 창조되고,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대부분도 38도선 북쪽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쳤다. 38도선 남쪽에서 그러한 문학과 발명품이 창조될 확률은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식함을 자랑한 링컨은 "모든 사람들이 38도선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39도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를 거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몇몇 지식인들을 제와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파이크만의 책을 읽어보기는커녕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두들 그의 의견에 반대했지만 링컨을 존중했기에 마셜 장군에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들의 큰 실수였다. 39도선으로 결정했다면 방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고 더불어 수많은 미군의 생명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영원한 운명이 될 38선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2.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권
당시 전선에 있었던 우리는 몰랐지만, 맥아더 장군은 서울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통치권을 넘겨주는 기념식을 하고 싶어했고 이 사실은 미국 정부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미 국무부는 한국 통치권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넘겨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일부 진영에서 이승만을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무부는 이에 대한 결정권을 UN에 위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에 반대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정당하게 선출된 한국의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우리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복귀시키지 않는다면 혼란이 발생할 것이고 누가 권력을 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이 헌법에서 정한 책임을 이행하도록 해 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고, 항상 그렇듯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쟁취했다.
《운명의 1도》 중에서, 에드워드 L. 로우니 지음. 장수영 옮김, 후아아엠 펴냄
저자인 에드워드 L, 로우니 장군(1917년생, 폴란드계 미국인)은 미 육군 중장과 대사를 역임했다. 1941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하여 많은 훈장과 포장을 받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맥아더 극동군사사령부의 당직 장교였던 극는 최초로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맥아더 장군에게 직접 보고한 장본인이다. 이후 맥아더 장군을 도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흥남철수작전에서는 흥남항을 폭파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한 인물이기도 하다
1970년에는 한미 제1군단장으로 취임했다. 한미 1군단은 6개의 한국군 사단과 2개의 미국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의 임무는 한국의 서해안에서부터 중부 산악지대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의 절반을 맡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동쪽 절반은 한국군이 맡았다.
***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39도선에서 더 이상 북진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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