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은 물고문, 김옥두는 통닭구이…“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72년 10월17일 비상계엄령과 함께 ‘10월 유신’이란 이름으로 독재체제를 공표하고 그 첫 수순으로 ‘정적’ 김대중의 측근들을 끌어다 고문했다. 사진은 그해 11월21일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하다 체포된 신민당 의원 조연하·김상현·조윤형·이종남·김한수 등이 73년 2월2일 서울형사지법의 첫 공판장에 출두한 모습. 유신정권은 이들에게 ‘일반이적 및 반공법 위반, 공갈, 뇌물수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을 적용해 2년의 실형을 살게 했다. <보도사진연감 74>
계엄포고령 제1호가 공포됐다.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지고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았다. 신문사·방송국·대학·국회의사당에 계엄군 완장을 두른 군인들이 무장경비를 섰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벌이던 중 해산당했다. “국회 해산으로 남편은 의원직을 잃었어요. 나는 비서들이 오면 몸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생활비를 조금씩 나누었지요.”
박정희는 평소 손봐주어야겠다고 벼르던 ‘악질’ 야당 의원들을 잡아들였다. 김대중과 가까운 김상현·조윤형·이종남·김녹영·조연하·김경인·박종률·강근호·이세규·김한수·나석호가 군부대로 끌려갔다. 김영삼의 측근 최형우도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동교동 비서들은 예외 없이 직격탄을 맞았다. 권노갑·한화갑·엄영달·김옥두·방대엽·이수동·이윤수, 심지어는 운전기사까지 잡혀갔다. 권노갑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얼마나 맞았던지 고막이 터졌다. 물고문으로 몇 번을 까무러쳤다.
김옥두는 자신이 당한 고문 실상을 회고록에 자세히 밝혀 놓았다. 김옥두가 잡혀간 곳은 광화문 경기여고 옆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이었다. 김옥두는 몇 시간 동안 몽둥이로 맞고 난 다음 발목과 손목이 묶이어 ‘통닭구이’ 고문을 당했다.
매달린 채로 물고문을 받다 여러 차례 정신을 잃었다. 정보부 요원들이 원한 것은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진술이었다. “각하(박정희)를 비방하는 놈은 모두 빨갱이다. 그러니까 김대중이도 빨갱이다.” 이것이 고문기술자들이 들이댄 논리였다.
김옥두가 시인하지 않고 버티자 수사관들은 머리를 시멘트벽에다 몇 번이나 패대기쳤다. 김옥두는 걸레처럼 짓이겨졌다. 고문은 며칠 동안 계속됐다. 정보부원들은 펜치로 김옥두의 손톱을 뽑고 혀를 잡아당겼다. 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버티는 김옥두에게 정보부원이 말했다. “이 새끼는 안 되겠다. 이놈은 너무나 악질이다.” 도대체 누가 악질인지, 누가 범죄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옥두는 다시는 동교동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8일 만에 대공분실을 나왔다. 그날 새벽 김옥두는 감시를 피해 동교동 뒷담을 넘었다. 이희호는 처참한 몰골을 보고 놀랐다. “비서들이 끌려가 그렇게 당한 것을 보고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요. 차라리 남편이나 내가 끌려갔더라면 덜 힘들었을 거예요.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참혹한 마음이었지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의 측근들에게 집요하게 캐물은 것은 지난 선거 때 정치자금을 댄 기업인의 이름이었다. 정보부에 끌려간 기업인 중에 아세아자동차 회장 이문환도 있었다.
정보부원들은 70살이 넘은 노인을 발가벗겨 몽둥이로 때리고 코로 물을 부었다. “그분이 그렇게 치가 떨리는 고문을 당했다는 걸 몇 달 뒤에야 알았어요.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한겨레신문 <이희호 평전>에서 발췌 (2015.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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