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안에 숲을 가지고 있다. 인간 정부의 재판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 인간은 나에게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 인간은 나에게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지만 자연은 나를 이 세상에 만족케 한다.
그래도 초목은 냇가에서 조용히 자라고, 물결치는 숲은 여전히 무심하기만 하다. 땅은 너무 고요하고 단지의 물은 끓어 넘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에 바쁘다.
진실한 지혜에 이르는 것은 구속이나 엄격함이 아니고 자유 분방함과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이다.
성공만이 나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다.
악마는 아주 부지런하다. 우리가 악을 존경하도록 만들기 위해 악마는 피곤을 잊은 채 부지런히 일을 한다. 악마는 적어도 근면의 미덕만은 갖추었다.
나는 23년 동안 침묵과 싸워 왔지만 침묵에 어떠한 틈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침묵은 끝이 없다. 말은 단지 침묵의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 사회를 바라보면서 나는 천국에서 가정을 갖느니 지옥에서 독신생활을 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성직자는 개혁가들만큼이나 고치기 어려운 질병에 걸렸거나 악마에 사로잡혀 있다. 성직자는 정치가들처럼 공격적인 화제를 즐긴다. 이는 우리의 종교가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우리의 시적인 재능과는 어울리지도 상통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의 하나이다.
나는 농부나 농장부가 되어 자유의 일부를 잃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싶지 않다. 직업 전선에 뒤어든 사람들은 대부분 사형이 확정된 죄수와 같은 신세가 된다.
인간의 종교에는 과학이 없다. 나에게 종교란 어느 위원회의 돼지에 관한 보고서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소의 목에 걸린 딸랄거리는 값싼 놋쇠 조각이 종루에서 흔들리는 묵중한 금속보다도 더 무겁게 느껴진다.
신들은 분파가 없다. 어느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는다. 자연은 성실하고 믿음이 깊은 얼마 안 되는 영혼의 편이고, 자연이 그 영혼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인가와 멀리 떨어진 언덕에서 홀로 사는 이를 보러간다.
노동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생각은 위대하다.
숲을 다스리는 것은 늘 묵직한 침묵이다. 보라! 숲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조용한 저녁 시간에 자연의 음유시인인 저 저녁참새는 무한한 여유와 시간의 영속성을 노래한다.
만일 우리의 밤과 낮이 항상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생이 꽃이나 방향초(芳香草)처럼 향기를 발한다면, 또 우리의 인생이 보다 부드럽고 보다 아름답게 빛나고, 보다 불멸에 가까운 생이 된다면 당신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인도인들은 히브리인들보다 조용하고 사려 깊으며 종교적이다. 그들이 신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히브리인들보다 순수하고 독립적이면서 개인 감정을 내세우지 않는다.
하느님은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라 하더라도 회개가 아닌 사색을 통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원하신다. 오직 자신을 잊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특정한 종교와 철학을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믿는 자를 구별하는 행위의 쓸모없고 불공정하고 철없는 편협성과 무지함을 개탄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기적이 없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자주 이야기한다.
기독교는 도덕적 관심에서 말하는 척하기 위해 늘 안달을 한다. 정말 끝이 없는 대단한 욕구이다. 아이에게도 회개하라고 외친다. 기독교인의 세계에서는 "주여, 이 불쌍한 죄인을 용서하소서"라고 외치지 않는 한 절대로 진리에 대한 정당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나는 두 종류의 사람을 안다. 절대 다수는 사회적 인간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삶을 산다.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들에 있다.그들은 유목(流木)처럼 물 위를 떠다닌다. 그들은 영원히 바다에 뜬 거품과 찌꺼기에 불과한 소식들만을 언제까지고 묻고 또 물을 뿐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싸움의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아주 희미하고 일시적인 본능에 따라 교회와 다른 제도들을 끊임없이 재생한다.
기독교의 거짓 설교자가 설교할 때마다 늘 자신의 믿음보다 더 융통성 있고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훌륭한 청중을 만나 그로 인해 거리끼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자신들이 말하는 기적과 예언이 힌두교도들이 신봉하는 경전에 기록된 기적과 예언에 비해 그다지 내세울 것이 못 된다는 사실에 선교사들이 놀라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사람과 멀어진 이유는 자연과 친밀해졌기 떄문이다. 태양과 달, 아침과 저녁에 대한 나의 관심이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한낮의 열기에 시달린 뒤에 듣는 개똥지빠귀의 노래는 그 얼마나 시원한 청량제인가!
유쾌하고 고상한 한 가지 생각만으로도 모든 사람은 하나의 종교로 묶을 수 있다. 종교의 종파가 많은 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순수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 오르는 이유는 가까이 있는 특정한 대상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특정의 대상들이 도처에서 서로 아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그림으로 환원되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자연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세상이 온통 인간의 것으로 차 있다면 나는 기지개를 켤 수 없을 것이고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나에게 인간은 제약인 반면 자연은 자유다.
침묵만이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침묵은흙처럼 다양한 깊이와 비옥도를 지니고 잇다. 침묵은 어떤 때는 사하라 사막과 같다. 침묵은 나를 전율케 하는 음악이다 침묵을 들을 수 있는 밤. 나는 말로 할 수 없는 말을 듣는다.
낙엽이 깔린 길을 걷는 일은 얼마나 신선하고 즐거운가! 그들이 무덤으로 가는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가! 그들은 얼마나 부드럽게 땅에 떨어져 바람에 구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가!
광대하고 굳건한 땅을 원료로 간단하지만 능률적인 쟁기를 가지고 동료 노동자 황소와 함께하는 쟁기질은 얼마나 고귀한 노동인가!
나는 막 지은 새 옷을 입고 교회에 가서 신도석 등받이 의자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는다. 평상복 차림으로 혼자서 보트를 타고 노를 저어 잠깐 동안 봄의 호수를 탐험하러 떠나는 소년에게 공감한다.
나는 때때로 새들에게 조언을 듣곤 한다. 그 소리는 인간적인 견해를 바로 잡는다. 그는 동요시인이다. 이 작은 회색 음유시인의 노래가 나의 노래를 고무시킨다. 어떤 고전작품보다 더 오래된 달콤한 전원시이자 목가이다.
신문 편집자, 인기 있는 성직자, 정치가와 연사 그리고 관리는 사회의 표면 위를 떠다니는 거품의 다양한 성분이라는 점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모두 동질적인 존재이다.
《소로우의 일기》 중에서 / 윤규상 옮김 / 도솔 펴냄 (2017.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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