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방금 전의 일을 곧잘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소위 말하는 ‘건망증’이라는 건데, 이런 나를 보면서 ‘아!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을 해본다. 중년의 건망증은 오래된 일은 기억을 잘 하는데 바로 전에 하던 일은 잘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맞는 말 같다.
며칠 전에도 목욕을 갔다가 옷장키를 잊어버렸다. 분명히 샤워를 하면서 옷장키를 샤워기에 걸어두고서 샤워가 끝나면 발목에 채워두려고 생각했었는데, 샤워하면서 옷장키의 존재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욕탕 안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히노끼탕에서 반신욕도 하고 사우나실에서 땀도 빼면서 느긋하게 1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리고 몸을 닦고 나가려고 보니, 아뿔싸! 있어야 할 키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인생을 덤벙덤벙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욕탕 안에 들어가 키를 찾아보려다 옷장안의 내 소지품이 무사한지 궁금하여 먼저 가보았더니, 옷장에 키가 꽂혀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벌써 옷장을 열어 보았구나 하는 생각에 힘이 쭉 빠졌다. 그런데 옷장 안의 지갑을 열어보니 카드며 현찰이며 모두 그대로 있었다. 누군가 키를 발견하고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옷장에 꽂아두었던 것 같다. 괜한 걱정에 순간적으로 마음만 조마조마 졸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무명(無明)에 쌓이면 괴롭다는 것인가. 천당과 지옥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옷장키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을 때 나의 마음은 지옥에 가 있었고, 지갑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천당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물건을 잃어버린 것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또 하나 있다. 몇 해 전에는 자동차 키를 분실했다. 집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때도 애타게 며칠간 온 집안을 찾아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다가 주차장에 있는 차에 가보았더니 차 트렁크에 꽂혀 있었다. 1층 주차장이라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텐데 자동차 키는 며칠간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그래도 마음씨 나쁜 사람 보다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그렇지만 나의 건망증 중 ‘압권’은 따로 있다. 이 일로 가족들에게 두고두고 놀림을 당했고, 지금도 조롱을 받고 있다. 지금부터 15년 전쯤의 일인 것 같다. 추석에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온가족이 서울역을 향하고 있었다. 서울역 지하철역에 내렸는데 고향 가는 기차의 출발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우리는 뛰기 시작했다.
나는 딸을 업고 뛰기 시작했다. 아들은 엄마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하철 개찰구를 막 빠져 나오려는데, 글쎄 순간적으로 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꽁딱꽁딱 뛰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딸은 보이지 않는다. ‘아! 딸을 잃어버렸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앞에 뛰어가던 아내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보지 못했는가? 우리 딸이 안 보여!”
나는 애타게 급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은 놀란 기색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마치 ‘무슨 일이 있어요?’ 하는 표정이었다.
그때 내 등뒤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나 여기 있잖아!” 돌아보니 딸이 내 등에 업혀 있었다.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딸을 업고 있다는 사실은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그때는 순간적으로 무척 놀라서 당황하였고, 그 일로 인해 내가 가장으로서 가족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 일을 생각할 때 마다 나의 몸에 '엔돌핀"이 나오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 그리고 가족들도 그 일을 이야기 할 때마다 폭소를 금치 못하니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고민하지 말고 순응하면 서 살도록 하자. 건망증도 내가 태어나 다시 이 우주로 돌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일 것이니 그대 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인생이란 때로는 잊고 사는 것이 있어야 건강에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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